"이제 어떻게 살라고"…상인들 '발 동동'

입력 2005-12-30 06:35:18

화마(火魔)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상인들의 분노와 절망만이 남았다.

불이 나자 소식을 듣고 달려온 상인들과 가족들은 평생을 일궈온 삶의 터전이 불길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일부 상인들은 불길을 잡는데 고전을 면치 못하는 소방관들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직접 불을 막겠노라 뛰어들다 제지당하기도 했다. 대부분 수십년 가까이 서문시장에 뿌리를 박고 살아온 상인들.

한달 남짓 남은 설 대목을 기대하며 상품을 평상시보다 2배 이상 들여 놓은 상태였다. 오랜 경기 침체와 대형 할인점의 공세에도 꿋꿋이 버텨오던 상인들이었지만 치솟는 불길 앞에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특히 피해가 극심했던 2층과 3층 점포 상인들의 절반 이상이 50대를 넘은 사람들. 마지막 남은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의 상실감과 피해는 더욱 컸다.

2지구 서관 3층에서 포목점을 하는 정달식(48) 씨는 자신의 점포로 불이 옮겨붙자 긴 탄식을 토해냈다. 16년 전 포목점 점원으로 들어와 온갖 궂은 일을 마다않으며 일궈낸 '목숨과도 같은' 일터였다.

순간 정씨는 불길 속으로 사라진 전 재산보다 두 명의 자식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대학생인 두 아이의 등록금 걱정이 가슴을 짓눌렀기 때문.

정씨는 "연말연시에 대비해 평소보다 서너배나 많은 물건으로 점포를 채웠다"며 "앞으로 어떻게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갈지 걱정"이라고 울먹였다.

생의 반 이상을 서문시장과 함께 해왔다는 김춘배(64·여) 씨는 삶의 의미조차 잃어버렸다.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곳에 들어와 34년 동안 생선과 젓갈을 팔며 평생을 바쳐온 그였다.

김씨는 "이곳은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보낼 수 있도록 해준 축복받은 터전"이라며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2지구 서관 2층에서 한복집을 하는 전명옥(51·여)는 남편(54)의 팔을 놓지 못했다.

"어찌 말로 다할까요, 어찌 말로…." 전씨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나직이 되뇌이기만 했다. 점포를 임차해 장사를 한 지도 수년. 전씨는 "매달린 동앗줄이 끊어지는 심정"이라며 "없이 사는 사람의 전 재산이 한 줌 재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마음이 어떻겠냐"고 탄식했다.

상인들은 쌓아놓은 물건보다는 영업장부를 들고 나오지 못한 것을 더 안타까워했다. 각종 외상값과 거래 내역이 빼곡이 적혀있는 영업 장부는 상인들에겐 생명줄과 다름없기 때문.

때문에 일부 상인들은 현장 통제선 밖에서 화재 현장으로 진입을 시도하며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홍순상(34) 씨가 형과 함께 시커먼 연기를 뚫고 불길 속으로 뛰어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홍씨는 20년 넘게 양말 가게를 하는 형의 미래가 영업 장부에 달려 있는데 어떻게 가만있겠냐고 했다. 물에 젖은 옷이 버적버적 얼어붙어도 홍씨는 추위도, 여유도 느낄 새가 없었다. 그가 말했다. "목숨보다 더 귀한게 가족들이 밥 먹고 사는 거에요."

30년 넘게 원단 도매상을 해온 김순자(67·여) 씨는 차마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했다. 평생 가족들의 터전이었고 이제는 딸아이가 희망을 키워가던 그 곳이 잿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도 김씨는 그저 발만 동동 굴릴 수 밖에 없었다. 김씨는 "원단은 다 타도 좋으니 제발 목숨줄을 쥐고 있는 영업 장부만이라도 건져와야한다"며 울부짖었다.

불길이 번졌다 사그라들기를 되풀이하는 동안 2지구 동관 1, 2층 상인들은 불길이 번지기전에 상품을 꺼내야 한다며 부지런히 몸을 놀렸다. 온갖 물건들이 거리와 3지구 복도를 점령, 마치 피난민촌을 방불케했을 정도.

김태수(55) 씨는 어깨 가득 원단을 지고 뛰듯이 잰걸음을 옮겼다. 영하의 날씨에도 김씨의 얼굴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그는 "소방관들은 건물 붕괴 위험이 있으니 들어가지 말라고 하지만 눈 앞에 내 물건이 가득쌓여 있는데 어떻게 피할 수 있겠냐"고 했다.

돗자리 대여섯채를 옮기던 한부연(72) 할머니는 기둥에 등을 기대고 가쁜 숨을 내뱉었다.

한 할머니는 TV를 보다 화재소식을 듣자마자 대명동에서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고 했다. 상점 옆에서 노점을 펴고 생선 장사를 하지만 이웃의 어려움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 할머니는 1천 900개의 점포가 화염에 휩싸였던 30년전 대화재의 악몽을 떠올렸다고 했다. 할머니는 "다들 다칠지도 모른다며 당장 그만두라고 하지만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 그 때의 기억을 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2지구 서관 1층에 화재가 나자마자 가족들을 동원해 상품을 옮기던 포목상 김상진(56) 씨는 "2지구는 전체 서문시장 단지 가운데 가장 점포가 많은 곳"이라며 "오랜 경기 침체와 대형 할인점 때문에 가뜩이나 장사가 안되는데 이런 큰 화재로 지구 하나가 무너지면 서문시장은 동반몰락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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