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 산등성이가 젖은 커튼을 널어 말린다
매달린 물방울이 입김 호호 불어 세상을 닦는다
말갛게 씻긴 하늘 모서리에 풍선을 단다
풀잎이 머금은 물기를 풀어 무대를 꾸민다
정원에선 멧새 한 마리 날아올라
새로운 막이 오름을 알리느라 분주하다
여름이 긴 팔 내밀어 마술 지팡이를 흔들자
코발트빛 무대 초록빛 배우 터질 듯한 함성
나무들은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친다
김승희(1964~) '비온 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어보는 시 는 강우(降雨)라는 평범한 자연현상을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한바탕 공연에 비유하여 엮어간 썩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동쪽 산등성이가 젖은 커튼을 널어 말린다'는 표현은 생기롭고 발랄한 이미지들이지요. 매달린 물방울은 입김을 호호 불어서 유리창을 닦듯 세상을 닦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을 생각나게 합니다. 비갠 하늘 귀퉁이에는 예쁜 풍선을 매어답니다. 풀잎이 잔뜩 머금은 초록 물감으로 우주라는 무대를 싱그럽게 장식합니다. 아름답고 활기찬 무대의 연극이 시작된다는 감격적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정원의 새 한 마리는 기운찬 비상(飛翔)으로 날아오릅니다. 여름이라는 무성한 계절은 재주 많은 마술사와도 같습니다. 여름의 팔에는 마술사의 상징이기도 한 지팡이가 걸려 있는데, 그가 지팡이를 흔들 때마다 초록빛과 코발트빛으로 장식된 무대 위에서는 일제히 탄성의 울림이 들려옵니다. 대지 위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초목들은 모두 무대의 관객들입니다. 여름이 펼치는 연기에 흠뻑 도취한 나무들이 드디어 기립박수를 치고 있다는 표현! 얼마나 우리를 신선한 기운으로 약동하게 하는 것입니까?
이동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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