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있는 한 서커스는 이어지죠"

입력 2005-12-23 10:40:39

유랑은 슬프고 고단함을 떠올리게 한다. 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으로도 이어진다. 삶의 여정을 유랑이라고 표현하는 이도 있다. 이리저리 떠돌며 웃고울다 가는 게 인생이라고 한다. '곡예사의 첫사랑'이란 노래가 있었다. '흰 분칠에 빨간 코로 사랑얘기 들려주던 어릿광대의 서글픈 사랑'은 히트를 쳤다. 유랑의 호기심과 슬픔이 겹쳐 전해졌다.

서커스단은 유랑하며 산다. 그러나 동춘서커스 박세환(朴世煥·61) 단장은 이제 유랑을 접을 수 있다. 내년이면 부천의 서커스 전용극장이 준공된다. 40년 삶의 결실이다. 1천500석 규모가 성에 차지는 않지만 제대로 된 서커스 학교를 세워 천막연습장을 벗어날 계획도 세운다.

놀이문화가 지천으로 널린 지금도 서커스가 경쟁이 있을까. 그는 "조용필이든 난타든 같은 조건에서 붙으면 서커스가 이길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그도 서커스의 전성기는 지나갔다고 여긴다. 기량도 예전만 못하다. 그러나 사람들 마음에 추억이 사라지지 않는 한 서커스는 언제까지나 이어진다고 믿는다. 일본 '태양의 서커스'는 세계 수준의 재벌이 됐다.

10년 전 러시아 서커스단 공연이 동춘서커스와 같은 시기 비슷한 장소에서 열렸었다. 그때 동춘에 몰린 사람은 러시아 서커스의 10배가 넘었다. 서커스를 잊지 않은 마음들이 너무 고마워 펑펑 울었다.

경주 출신으로 종가집 종손이다. 경주중·고를 마친 해 가수를 꿈꾸며 가출했다. 물어물어 동춘을 찾아갔다. 당시 동춘은 최고의 연예인 집합소였다. 손꼽히는 연예계 스타들이 거쳐갔다. 여섯 달만에 무대에 섰다. 첫 무대에서 부른 '무너진 사랑탑'은 음정 박자 모두 엉망이었다. 3년만에 동춘의 인기 사회자로 탈바꿈했다.

1972년 4월 12일을 대중문화의 판도가 바뀐 날로 기억한다. 드라마 '여로'가 첫 방영된 날이다. 낮이면 새마을노래를 부르며 정신없이 일하던 사람들이 밤이 되자 TV 앞으로 몰려갔다. 서커스에도 발길이 끊겼다.

이즈음 그는 동춘을 벗어나 부산에서 장사를 했다. 타고난 입담으로 적잖은 돈을 만졌다. 그러다 동춘이 해체될 처지라는 소식을 들었다. 있는대로 털고 외상까지 해 동춘을 인수했다. 식민지 시절 박동춘이 만든 동춘 서커스의 명맥이 그에게로 이어졌다.

80년대 들며 서커스를 살리자는 여론이 돌았다. 외환위기가 덮치자 오히려 찾는 사람이 늘었다. 살림살이 고단함을 서커스의 추억으로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들이 생겼을까.

예술대학 강단에도 선다. 무용과 서커스의 접합을 가르친다. 지난해에는 국립극단 단원들과 함께 뮤지컬을 공연했다. 극단에 고향 사람들을 데려오지 못한 게 아쉽다. 서커스 재주로 살아 갈 길이 많음을 안 까닭이다. 겨울이면 단원들이 건설 현장에서 용돈을 벌던 시절이 있었다. 줄 타는 재주 덕에 공사 현장 꼭대기도 가뿐히 올라가곤 했다.

한 달에 한 번 꼴은 고향을 찾는다. 지금도 고향 어른들은 생전의 부친처럼 "언제 사람될래" 라고 한다. 걱정하는 마음이 고맙다. 고향 경주에 서커스 전용극장을 세우는 꿈은 그런 고마운 마음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놀고 즐길 공간이 많지 않고서는 관광 경주의 미래가 크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서영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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