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노랗게 물든 은행잎과 어른 손바닥보다 넓은 플라타너스 잎들을 거리에서 본 듯했는데, 어느 사이 한 해가 훌쩍 가고 있었다. 시간의 흔적은 참으로 무심해 보인다. 가지만 앙상한 가로수 밑에, 몸을 움츠리며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유난히 바람 불고 추운 12월이 제 역할을 다하는 것 같아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이제 한 해를 또 보내며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들을 돌아본다. 시간으로, 날짜로 1년을 경계 삼는 것 또한 인위적인 것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 경계가 삶에 대한 계획과 반성을 하게 한다.
올해에도 역시 많은 일들이 있었고, 또 생겨나고 있다. 세월이 빨라 한 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고 하지만 돌아보면 한 해 동안 우리 삶에서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행해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문화에 대한 담론이 풍성했던 해였고, 또 그 어느 때보다도 문화의 힘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보여주던 한해이기도 했다.
이 추운 겨울날, 서울에서는 문화의 향기가 아름아름 퍼져가고 있음을 본다. 서울의 중심부인 서울시청 앞에서 스케이트를 지치는 아이들의 꽁꽁 언, 그리고 해맑은 웃음을 보면서 삶의 여유를 느끼고, 그 옆에서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빛의 향연이 추운 겨울을 녹이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에 끌려 가족들과 연인들, 동료들이 모이고 사람들은 나름대로 추위를 즐기는 여유로움마저 보여주고 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겨울을 즐기기 위해 서울의 중심부에 일부러 찾아간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불빛 하나에 아름다움을 느끼고, 아이 손잡고 놀거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 함께 하는 사랑의 문화를
그러나 12월이면 잊지 않고 찾아오는 것 또한 있다. 어려운 우리 이웃에 대한 온정의 손길이다. 불우한 이웃을 돕는 행위가 시기를 정해서 있어야 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독 12월에 이웃사랑을 외치는 소리가 많이 들리는 것은 아마도 12월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리라.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도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모두가 어울리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현대사회는 집단을 해체하는 데 거침이 없다. 사람은 많으나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세상, 가족조차 흩어지는 일이 자연스러운 세상이다. 극단적으로 사람과 사람이 아닌 사람과 컴퓨터에서만이 존재하는 관계도 너무 많다. 정보화 세상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하에 오히려 더욱 민주적이지 못한 비문화가 큰 목소리를 내면서 획일성을 요구하는 일을 우리는 너무 자주, 가까이서 본다.
추운 날씨다. 이 추위에 한 번 더 정신을 차리고 우리 주위를 돌아보자. 정말로 어려웠던 지난 시절에 오히려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충만했었다. 내 삶을 성찰하기 위해서, 보다 낳은 다음 해를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내 마음 속에 사랑의 마음을 채웠으면 한다.
삶의 표식은 그 사람의 모습에 나타난다고 한다. 2005년, 내가 이룬 삶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과 내 얼굴에 새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흔적은 평생을 통해 나타날 것이다. 미래의 내 모습이 아니더라도 사랑은 아름다운 나의 삶을 위해서도 절실하다고 말하고 싶다.
한 해 동안 어려웠던 시간을 보낸 사람, 행복을 이룬 사람, 실패와 좌절을 딛고 목표를 이룬 사람, 그리고 그저 바쁘게만 달려와 미처 뒤돌아보지 못한 사람들 모두 다가오는 새해를 보다 가슴 벅차게 맞이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 이 한 해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한 해의 마무리를 잘 했으면 한다. 명년에는 조금만 더 지금보다 삶의 여유를 가꿀 수 있는 그런 생활이었으면 한다. 그리고 조금만 더 바쁘지 않고 나눠줄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으면 한다. 2005년 12월, 한 해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내기를 바란다.
유인촌(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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