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규 지음 / 이가서 펴냄
세종 19년인 1437년. 유교 정치를 표방하면서도 세종은 개인적으로 불도를 가까이 했다. 승려들이 득세하는 낌새가 보이니 유생들의 반발이 거셌다. 1446년. 세종은 기어이 내불당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조신들은 일제히 철회를 간했고, 성과가 없자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귀가해버렸다.
"학사들이 모두 나를 버렸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세종이 황희에게 하소연했다.
궁 안에서만 사는 임금이 부모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자 생긴 일임을 안 황희는 집현전 학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정승이 제 일은 안 하고 유세나 다니니 체신이 없다"고 힐난해도 그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 84세의 노구를 이끌고 손자뻘인 유생과 학사들을 찾아다닌 그는 결국 모두 제자리로 돌아오게 했다.
세종대왕이 조선왕조 500년간 문민정치의 기틀을 다지고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었던 데는 당대의 명재상이요, 청백리인 방촌 황희(黃喜)의 공평무사하고 헌신적인 국정수행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처럼 성군(聖君) 밑에는 언제나 명신(名臣)이 있었다.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중국의 명재상들의 열전을 담은 책 '재상(宰相)'이 나왔다.
지은이 박윤규는 "우리는 흔히 역사를 왕조사로 이해한다. 최근에는 민중사로 바라보려는 시각도 많아졌다. 하지만 하늘인 왕과 민초들 사이에서 그들을 중재하며 실질적으로 역사를 주도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재상이다"라고 말한다.
'재상은 어떤 자리인가?'
역사를 왕들의 초상화 전시장 정도로 여겼던 저자에게 재상은 그저 '공무원의 우두머리', 즉 행정부의 수장으로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것 외에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저자에게 야담서 '청구야담'에 소개된 명의 조광일의 변설은 의미심장했다.
뛰어난 의술을 지니고도 고관대작의 집에는 발길조차 하지 않고 빈궁한 백성들만을 찾아 구완하는 조광일을 보고 한 선비가 공명을 취하지 않는 그를 나무랐다.
그에 조광일은 "대장부는 재상이 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의인이 될 것이오. 재상은 도로써 사람을 구제하지만 의인은 의술로 사람을 살려내니, 궁함과 현달함의 격차가 있으나 그 공로는 같소"라고 일침을 가했다.
"하늘은 왕을 내리고, 땅은 재상을 세운다." 재상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 하여 신하의 우두머리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이 책은 그러한 인식을 거부한다.
하늘과 땅이 음양으로 공존하듯이 왕과 재상도 서로 대등하다고 본다. 왕은 하늘의 대리자이고 재상은 땅, 모든 민중의 대리자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왕과 재상은 역사를 주도한 오랜 러닝메이트라는 특이한 견해를 제시한다.
촉한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고, 제나라 환공에게는 관중, 조 혜문왕에게는 인상여가, 고려 공양왕에게는 정몽주, 조선 세종에게는 황희가 있었다.
관중은 "정치를 안정시켜 장차 천하를 도모하고자 한다면 무엇부터 해야 옳은가"하고 묻는 환공의 물음에 "백성을 사랑하는 일부터 시작하라"고 충언을 올린다.
인상여는 조나라의 귀중한 보물 화씨벽을 진나라 왕이 큰 나라의 위세를 부리며 갈취하려 하자 진나라 왕의 무례함을 크게 꾸짖고 보물을 고스란히 돌려 받는다. 재상의 용기와 지혜로움이 발하는 일화들이다.
재상 '한국편'에서는 포악한 차대왕을 죽이고 신대왕을 세우면서 고구려 최초의 국상이 된 명림답부부터 조선 고종 때의 영의정, 초대 총리대신인 김홍집까지 18인의 열전을 담았다.
'중국편'에서는 문왕,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천자의 나라로 세운 강태공에서부터 촉한의 재상으로 유비와 유선을 보좌한 제갈량까지 15인의 재상을 소개한다.
저자는 "외견상 오늘날의 재상은 국무총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민주 국가에서는 대통령이나 수상이 고대의 재상과 같은 역할"이라는 견해를 제시하며 "재상의 꿈이 있는 정치인은 고대의 재상들이 그랬듯이 먼저 자신을 닦아 바로 세우는 수신(修身)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라는 따끔한 충고를 잊지 않는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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