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광장-다양성 속의 사회통합을 향하여

입력 2005-12-12 11:40:27

며칠 전 파주 보광사 안 비전향 장기수 묘비를 북파공작원 출신들이 부순 사건이 있었다. 그들은 묘비에 붉은 페인트칠을 했고, 심지어 어떤 묘비는 흰색 유골함이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훼손되기까지 했다. 거의 같은 시각, 실천불교전국승가회와 비전향장기수들은 조계사에서 묘비들을 자진 철거하겠다는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치 애절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안타까움이 겹쳐져 스쳐가는 대목이다.

'부관참시(剖棺斬屍)!'

큰 죄를 짓고 죽은 사람을 뒤에 다시 극형에 처하던 일로서 관을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 주로 사화 등에 연루된 이들에게 가끔 행해지던 일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비석 선생이 쓴 '손자병법'에 보면 원수를 갚기 위해 초나라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하려는 오자서에게 왕의 무덤 위치를 알고 있는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장군, …예로부터 군자는 아무리 원수라도 그 사람이 죽어 버리면 그로써 원한을 깨끗이 풀어 없애는 법이오. 그런데 장군은 원수의 시체를 꺼내어 목을 자르겠다고 하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요?" 하지만 복수에 눈이 먼 오자서는 평왕의 시체를 꺼내 두 눈알을 후벼 파내고는 구리 채찍으로 300대나 갈겼다. 그리고는 조각조각 흩어진 시체를 모래밭에 뿌리고는 발로 질근질근 밟아대기까지 하였다.

이번 보광사 사태를 이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곡괭이가 유골에 닿기 직전 경찰들이 만류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간담이 서늘해져 온다. 아, 우리 사회가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삭막하고 극단적으로 변하게 되었는가?

필자는 소위 유럽연합법 전공자다이. 유럽연합(EU)은 국가간 연대와 협력을 통한 지역간 통합을 지향하고 있으니 필자는 유럽통합론자라고 해도 좋다. 유럽통합의 모토를 단 한마디로 정의하면 '다양성 속의 통합(United in Diversity)'이다. 이와 같은 통합을 위해 EU는 인간의 존엄성, 자유, 민주주의, 평등, 법치 및 소수자들의 권리를 포함한 인권존중의 가치를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EU는 이 가치들을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다원주의, 차별의 철폐, 관용, 정의, 연대 및 남녀평등원칙을 존중하고 있다.

적잖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25개국으로 구성된 EU가 각 회원국의 다양한 정치'경제제도와 사회문화적 배경을 극복하면서 단일한 가치와 정책 목표 아래 지역통합을 수행할 수 있는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차이(다름)에 대한 이해와 포용'이다. EU는 나와 너, 그리고 그와 우리에 대한 고유성 혹은 정체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했던 것이다. 만일 EU가 오직 '하나의 색깔'만을 수용하고 '다른 색깔'은 배제해 버렸다면, 과연 오늘날의 유럽통합이 가능했을까?

우익이 있으면 좌익이 있다. 그 낱말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우익과 좌익은 비행기의 양날개와 같다. 오른쪽'왼쪽 날개가 균형을 이루어야 비행기가 흔들림 없이 순항할 수 있는 법이다. 또한 국군 포로가 있으면 비전향장기수도 있다. 우리가 송환되지 못하는 국군 포로들과 그 가족들의 아픔을 공유하고 안타까워하듯 비전향장기수와 그 가족들의 아픔도 같이 나누고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보다 성숙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고와 행동의 균형이 필요하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 그리고 관용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고 바르다는 아집을 벗어나 나도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너와 그의 생각과 행동도 옳고 바를 수 있다는 관용의 자세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다양성 속의 사회통합'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의 지역통합에 주목하는 동시에 그것이 우리 사회에게 던지는 교훈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차별보다는 존중을! 배제보다는 포용을! 분열보다는 연대를! 법치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민주사회를 정착시키기 위해 우리 모두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채형복/ 영남대 법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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