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수능시험의 뒤끝이 의외로 조용하다. 지난해 같은 대대적인 부정행위 파문이야 드문 일이라 쳐도 시험 과정이나 문제 오류, 복수 정답 등에 대한 논란이 예년에 비해 한결 적은 편이다. 특히 해마다 단골로 제기되던 난이도 시비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은 참 오랜만의 일이다.
고교 교사들에게 물었더니 시끄럽지 않을 뿐 속골병은 더 깊다고 했다. 내막은 이렇다. 자연계열의 경우 시험 이튿날 학교에 와서 가채점 결과를 내놓으며 희희낙락하는 학생이 많았다. 평소 애를 먹는 언어영역의 난이도가 낮았기 때문이다. "언어에 맺힌 한을 풀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만세 소리도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점수가 올라간 게 혼자만의 일이 아니고, 만점자도 부지기수라는 얘기에 낯빛이 어두워졌다. 언어가 쉽게 출제됐다는 뉴스에 그러려니 했는데 모두가 잘 치렀다면 표준점수로는 득을 볼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 탓이다.
여자 고교의 풍경은 좀 달랐다. 수리영역이 어려워 시험을 망쳤다는 침울한 분위기가 교실을 짓누르고 있었다. 특히 여학생들이 약한 공간도형 문제가 몇 개 출제된 것이 치명타였다. 여학생들이 강세를 보이는 언어영역이 쉽게 출제돼 표준점수로 환산하면 남학생들에 비해 한층 불리해졌다는 이야기는 결국 여학생들의 여린 어깨를 무너뜨렸다.
상황이 이런데도 난이도 시비가 나오지 않는 건 표준점수제 때문이다. 표준점수란 과목 간 난이도 차이를 줄이기 위해 지난해부터 도입된 것이다. 영역·과목별로 전체 수험생들의 원점수 분포를 정상분포로 바꿔 수험생 개인의 점수가 평균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가를 표시하는 환산점수다.
표준점수로 환산하게 되면 몇 과목의 난이도 조정이 실패해도 크게 시끄러운 상황은 생기지 않는다. 쉽게 출제된 과목은 수험생들의 점수가 전반적으로 좋기 때문에 그렇고, 어렵게 출제된 과목은 다른 수험생과 비교한 표준점수 손해가 적기 때문에 그렇다. 표준점수를 가장 합리적인 성적 표시 방법이라고 하는 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하지만 이는 출제기관이 내놓는 이론적인 이야기일 뿐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시끄러움은 막았다고 해도 속으로 골병드는 수험생은 의외로 많다. 모든 수험생이 모든 과목에서 평균적인 성적 경향을 따라갈 순 없기 때문이다. 특히 쉽게 출제된 과목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심각하다. 자신이 잘 하는 과목이 쉽게 출제되면 아무리 시험을 잘 쳐도 좋을 게 없고, 쉬운 과목에서 혹시 실수라도 한두 개 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난해처럼 만점자가 너무 많아 2등급이 나오지 않는 극단적인 상황이야 없을지 몰라도 수험생들은 수능 성적표를 받아들 때까지 얼마나 가슴을 졸여야 할지 모른다.
어떤 시험이든 응시자 모두에게 합리적이라는 반응을 기대하긴 힘들다. 그러나 전국의 수십만 수험생이 응시하는 수능시험이 갈수록 출제기관의 입장으로 치우치는 느낌이 드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2008학년도부터 도입되는 등급제는 더욱 그렇다.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이 국민에게 한을 재생산하는 이런 비합리적인 시스템은 언제쯤 달라질까.
김재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