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형님이 보내온 쌀 한 말

입력 2005-12-03 09:58:07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형님께서 쌀 한 말과 김치 한 통을 부쳐왔다. 일 년 마지막 농사가 마늘 파종인데, 이 일을 마치고 11월 말쯤이면 형님 내외는 매년 햅쌀을 찧고 김장을 해서 맛보라고 보내온다.

환갑이 훨씬 넘은 두 내외가 일년 내내 땀 흘려 지은 것이기에 그 어떤 선물보다 고맙게 받는다. 나는 그들의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마늘,고추,참깨,콩 등 형님이 주는 농산물을 가지고 올 때는 꼭 제값을 쳐준다.

다만 그 해의 쌀 한 말만은 형제간의 우애의 징표로 생각하고 공짜로 얻어먹는다. 쌀을 받던 날, 하얀 쌀밥을 밥그릇에 넘치게 담아 김치를 손으로 찢어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올해는 쌀값이 내려 헛농사 지은 것 같다"는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푸념 섞인 형수의 말이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형님은 해방 몇 해 전에 태어나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전후 시대를 겪어야 했기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지금까지 농사에 일생을 바쳐왔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가난뿐이었다. 소작과 개간으로 시작하여 땅에 희망을 걸고 젊음과 땀을 쏟았다.

그 땀은 노동의 고통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다를 바 없었다. 피와 땀을 흘린 덕택에 부모님 잘 모시며 적잖은 옥토도 장만하고 동생인 나와 지식들을 공부시킬 수 있었다. 우리들이 객지에서 자리 잡아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돌봐주느라 형님 내외는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하고 일했다.

선산을 지키고 조상을 모시며 가족 뒷바라지에 희생해온 고향 지킴이였다. 땅과 함께 살아오면서 한번도 고향을 원망하지 않았다. 도회의 일터로 나가 성공한 사람들을 더러 부러워하기도 했고 때로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고향땅을 지켜온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손이 많이 가는 밭농사가 주가 되다 보니 형님 내외의 일은 무척 힘들었다. 여름에 만난 형님의 얼굴은 햇빛에 그을려 숯덩이 같았다. 형수는 여자로서 과중한 노동 때문에 몸이 성한 곳이 없다. 만날 때마다 이제 일을 그만 줄이고 편히 여생을 보내라고 말하면, 그래야지라고 하면서도 막상 농사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것은 물욕이 아니라, 노동의 진정한 의미를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호흡해온 땅에 대한 농군의 순수한 사랑이기도 했다. 아마 땅 위에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흙에서 떠나지 못하리라. 이는 우리 형님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시대에 농촌에서 고향땅을 지키고 있는 육십 대 이상의 모든 농민은 다 그렇다.

올 여름 고향집에 들르니, 마당 한 구석에 새로 산 트랙터가 보였다. 점점 노약해지다 보니 기계의 힘이 필요했으리라. 하지만 외상으로 구입한 비싼 농기구 값을 다 갚으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다. 그 돈을 마련하려면 또 뼈골이 아프도록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왜 이렇게 무모한 일을 자초했느냐고 힐난조로 말을 건네니 형님이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 웃음에서 농부 특유의 우직함과 순박함이 묻어났다. 아침 출근길 고속도로가 주차장이었다. '쌀시장개방협상 국회비준반대' 시위로 경찰과 농민 단체가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대치하고 있다는 방송을 들었다.

나는 교통 체증에도 전혀 짜증이 나지 않았다. 늦어 수업을 하지 못해도 학생들에게 크게 미안해하지 않을 것 같았다. 느긋하게 기다렸다. 주차장이 된 고속도로에는 초겨울 아침 햇살이 청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햇빛 속으로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허리를 굽혀 괭이질을 하는 형님과, 마늘 논에서 엎드려 김을 매고 있는, 일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이 스쳐갔다. 순간 나의 눈가가 잠시 뜨거워졌다.

신재기(문학평론가.경일대 교육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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