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밖' 사람들-문경시 갈전3리 '중마' 마을

입력 2005-11-12 0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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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가은읍 갈전3리 속칭 '중마'마을 가는 길은 영남팔경 중 으뜸으로 치는 진남교반과 문경의 젖줄인 영강천 상류 마성면 구랑리를 지나간다. 수석(壽石) 동호인이라면 한번쯤은 찾아왔을 구랑리 하천에는 까마귀처럼 검은 오석(烏石)이 수천년 세월 물살에 깎여 빛나는 피부를 자랑하며 반짝인다.

가은읍으로 향하는 지방도에서 좌측으로 꺾어든 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5km쯤 올라가면 '중마'마을.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15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6가구 8명만 남았다. 임진왜란 때 몸을 피해서 들어왔던 의령 여(余)씨 후손인 여윤옥(72) 김수남(72)씨 부부, 여운오(77) 안정자(79)씨 부부와 이남순(86)·이순분(86)·조상윤(76)·이차순(76)씨 등 여윤옥씨 형수 4명이 주민의 전부다.

여윤옥씨는 태어나서 한 번도 이 곳을 떠나본 적이 없는 토박이. 18세 때 결혼해 54년을 부인과 살면서 손바닥만한 농토에서 나는 쥐꼬리 소득으로 용케도 3남2녀를 훌륭히 키웠다. 여씨는 "마을에서 나이로도 가장 어리지만 족보로 쳐도 가장 아래 대(代)라 바쁜 농사일 속에서도 4명의 형수가 불편하지않도록 모시는데 항상 신경을 쏟는다"고 했다.

앞은 갈미봉, 뒤는 작약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농토라곤 논 1천평과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200~300평 크기의 밭이 전부인 중마에는 아직까지 새집이라곤 하나 없이 옛 모습 그대로다. 집집이 방 바닥에 늘려있는 덜 말린 고추와 콩, 부엌 부뚜막과 그을린 천정, 작은 찬장, 헛간은 너무나 정겹다.

여씨는 20여 년 전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면서부터 더욱 바빠졌다. 전구 교체, 보일러 수리, LPG용기 교체 등 마을의 잡다한 일들이 모두 여씨의 몫이 됐기 때문.

여씨는 하지만 "형수들이 모두 연세에 비해 건강하시고 지금도 하루도 거르지않고 밭에 나가 힘든 농사일을 거뜬히 해내고 있어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산골마을 소득원은 무척 다양하다. 콩, 들깨, 서숙, 땅콩, 감자, 고구마, 파, 옥수수, 감은 물론 봄부터 늦가을까지 틈나는 대로 주변 산에 올라 다래순, 산나물, 버섯 등을 따서 시장에 내다 팔며 살아간다.

마을의 교통수단은 경운기 1대가 고작이다. 가은읍내에 가려면 하루 한 차례, 윗마을인 '상담마'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해 저녁 7시에 되돌아 오는 버스를 이용해야한다. 이때문에 산나물, 콩, 채소 등 가은장에 내다 파는 모든 농산물은 버스를 통해 조금씩 실어낼 뿐 한꺼번에 많은 양은 힘에 겨워 출하를 할 수조차 없다. 농번기에 장보러 갈 때엔 시간절약을 위해 온 집안이 협의해 2천 원씩 갹출해서 택시를 타기도 한다.

이마을에서 가장 어른인 이남순(86)씨는 8남매를 키웠는데 이씨는 이 마을에서 가장 부지런하기로 이웃에까지 소문이 나 있었다. 이씨는 "자식들은 농사일이 너무 힘들다며 한사코 편히 쉴 것을 바라지만 농사지어 자식들에게 나눠주는 즐거움 때문에 죽을 때까지 농사일을 놓을 수가 없다"며 "요즘 들어 귀가 조금 어두울 뿐 하루종일 일을 해도 아픈 곳은 한 곳도 없다"고 자랑했다.

김수남씨는 "18살에 시집와 오늘까지 한 번도 큰 소리쳐 본 기억이 없다"며 "집안끼리 모여 사니까 매일 조심의 연속일 뿐이고 그저 '예, 예' 하며 어른들 모시고 일만 하며 살았다"고 했다. "다른 성씨끼리, 남남이 모여 살아야 친구도 생기고 관광버스 타고 놀러도 가겠지만 집안끼리만 모여 사니까 재미는 덜하지." 김씨가 남모를 불만(?)을 호소하며 웃었다.

여윤옥씨는 60~70년대 당시 집안 어른들은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 겨울철이면 주변 산에 올라 장작 등을 해서 지게에 가득 지고 상주 함창까지 30리 꼬불꼬불 산길을 오가며 나무를 팔았다고 했다. 지금 사람들 같으면 천금을 줘도 못할 일이겠지만 당시 장터에 가면 사람들이 나무값을 깎기 위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는 경우가 많아 어쩔 수 없이 헐값에 팔고 어두운 산길을 허기진 배로 되돌아 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여씨 부부는 올해 들어 신나는 일 하나가 생겼다. 지난 3월 서울에 산다는 임채석(56) 신순연(51)씨 부부가 마을에 나타나 이 마을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해달라며 매달리는 바람에 2천여 평의 농토를 구입해 준 것.

"그동안 마을에서 농토를 매매한 적이 거의 없어 값을 매기기가 어려웠어. 아직도 이 곳 밭은 평당 5천 원에서 1만 원이 고작인데 요즘은 마을 아래 가은읍으로 가는 새길 공사가 시작된 탓인지 부쩍 낯선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서울에서 보험회사 홍보부장으로 근무했다는 임씨는 "퇴직 후 농사를 짓기 위해 강원도, 충청도 등 전국을 6개월 이상 돌아다니다 우연히 이 마을에 왔다가 산세도 너무 좋고 주민들 인심도 넉넉해 조르고 조른 끝에 농토를 구입했다"고 자랑했다.

임씨는 또 "내년 봄엔 황톳집을 짓고 유기농을 시작할 생각"이라며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두 딸도 실망은커녕 너무 좋아해 다행"이라고 했다.

여윤옥씨는 "30여 년을 전기료, 농지세, 가옥세 등 고지서 들고 다니며 집집이 나눠주는 동네 반장을 맡아 왔는데 내년에는 임씨에게 반장도 넘겨주고 궂은 일도 도맡아 시킬 작정"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문경·장영화기자 yhjang@msnet.co.kr

사진 : (위)중마 마을 약도. (아래)중마마을 막내둥이 여윤옥씨가 소풀을 하러 가는 길에 도랑에서 빨래하고 있는 부인 김수남씨와 잠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뒤편에 내려놓은 지게는 40년 정도 매고 다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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