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통제소를 지나 집단시설지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59번 국도를 따라 20여분쯤 달렸다. 홍류동으로 물을 쏟아내는 계곡의 가파른 외길을 조심스레 올라가니 평원처럼 펼쳐진 곳이 나왔다. 마장마을이다. 국립공원 가야산 남쪽 경계와 인접한 해발 950m 산자락, 행정구역으로는합천군 가야면 치인2리다.
마장마을에서 초막골로 향하는 길에는 인가와 인적이 끊기고 듬성듬성 고랭지 채소밭자락만 맨살을 드러낸 채 엎드려 있다. 길 양 옆으로는 들국화와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넓은 평원에는 억새군락이 은빛 물결을 일렁이며 장관을 이룬다.
여기에서부터 다시 왼편으로 1㎞쯤 더 올라가면 막다른 길. 거창군과 경계를 이루는 이 곳이 오늘의 목적지, '밝달가마'다.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엮은 대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니 초막 두 채가 숲속에 폭 파묻힌 채 한가롭다. 여기가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에 기록된 십승지(十勝地)의 한 곳, '미래의 땅' 만수동(萬壽洞)이 아닐까.
몇 번에 걸친 취재요청을 거절했던 밝달가마의 그릇장이 여상명(48)씨도 마음 먹은 듯 반갑게 맞아주었다. "보잘 것 없는 그릇으로 뽐내기 싫고 세상사람들의 안주거리가 되기 싫었다고나 할까요."
마침 이 날은 가마에서 그릇을 끄집어 내는 날. 여씨가 가마에 들어가 밖으로 건내주는 찻그릇들은 아직도 온기가 남아 어릴 적 엄마의 가슴처럼 따뜻했다. 가마내기를 함께 거들며 "불 땔때 왔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아쉬워하자 "불지핌은 정성이라 외부인은 들이질않는데 도자기를 전공했다는 사람이 잘 알면서 그러느냐"며 핀잔을 준다.
가마내기 작업이 끝나자 초막 안으로 안내를 받았다. 초막 한채는 도자기를 빚는 작업장이고, 또 한채는 차를 마시며 생활하는 공간. 아름드리 나무를 깎고 황토벽돌을 찍어 1여년 동안 손수 지은 것이라고 한다.
초막 안 온돌방에는 찻잔들이 쌓여 있고, 황토에서 내뿜는 흙 냄새와 차향(茶香)이 물씬 풍겼다.
넓게 트인 유리창 밖으론 갈대와 함께 펼쳐진 초막골 평원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여 마음이 탁 트이는 듯 했다. 구들막이 따로 없이 온 방안은 따끈따끈했고 여씨는 화롯불에 도자기 주전자를 얹어 직접 재배했다는 녹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밝달'이라는 이름에 대해 묻자 여씨는 "높은 산자락에서 혼자 밝은 달과 함께 산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 어원은 '배달'인 만큼 역사의 숨결이 물씬 풍기는 뿌리깊은 찻그릇을 만들기 위한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때묻지않은 그릇을 굽기 위해 세상과 인연의 끈을 놓기 위한 고집"이라는 그의 설명을 듣고 나니 자리 하나만큼은 제대로 자리잡은 것 같았다.
따끈한 찻잔이 서너번 돌고, 산속에서 혼자 살아가는 생활에 대해 물었다. 첫 마디에 여씨는 "흙과 함께 밤낮 씨름하다보면 무서운 것도 없고 세월가는 줄도 모른다"고 내뱉는다. 그러면서 기자를 힐끔 쳐다보더니 "신문을 보지 않아 기자 양반에겐 미안하오. 세상을 멀리 떠나온 놈이 복잡한 세상소식 알아서 뭐하겠소. TV·라디오도 물론 없다오."
여씨가 그나마 세상소식을 귀동냥하는 것은 해인사 선방 수행스님들이 다선(茶禪)을 위해 올 때나 가끔씩 산 아래 시골장터(가야면 황산리) 또는 부인(권명숙·무용교사)과 아들(승연·21, 정현·11)을 만나러 대구에 갈 때뿐이다.
"힐끔 세상 구경하고만 올 뿐 산 속에 들어오면 모든 것이 잊혀진다"는 여씨는 영락없는 스님이다. 머리는 스님들처럼 삭발하고, 수염은 길렀다. 이틀 전 가마 불지핌을 위해 정성스레 깎아 머리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머리는 한번 깎으면 자주 깎지 않아서 좋고, 수염은 자주 면도하기 싫어서 기르지요.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산 아래 이발소에 갔다가 주인이 없어 세번이나 허탕치고 난 뒤 직접 거울을 보며 10여년째 이 짓입니다. 처음 온 사람들은 제가 스님인 줄 알고 합장까지 합디다."
스님같은 그릇장이 여씨가 만든 찻그릇은 평상심을 생각케 한다. 호들갑스럽지 않고, 유별나지 않고, 늘 같은 표정으로 사람들의 눈을 편안하게 한다. 적절한 가벼움, 소박한 질감, 부드러운 가능성, 손때가 묻을수록 정겨워지는 촉감은 '흙의 맛'을 아는 그만의 냄새다.
여씨는 늦깎이 그릇장이다. 경북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대기업(현대중공업)에 다녔던 '엘리트'였다. 하지만 "틀에 박힌 조직생활이 맞지 않아 입사 2년 만에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대학시절 불교동아리때 접한 '차와 찻그릇'에 대한 미련을 따라 세속의 험난한 길을 돌고돌아 가야산 초막골을 지키는 고집불통(?) 그릇장이가 됐다.
그도 처음에는 대구에서 차와 찻그릇을 파는 공방을 열어 장사에 재미도 붙였고 짭잘한 수익도 챙겼다고 했다. 그러나 차에 대한 식견이 넓어질수록 장사꾼(?)으로 전락한 일반 도공들이 만든 찻잔이 맘에 들지 않았다.
"때묻지 않은 나만의 독특한 그릇을 직접 만들고 싶었죠. 두 아이까지 둔 남편의 속앓이를 알아챈 집사람의 동의를 얻어 시내에서 찻그릇만 만드는 공방을 차렸는데 사고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는 세속을 떠나 가마 앉힐 자리를 찾아 나섰다. 태백산 계곡과 소백산 골짝, 강원도 정선 등 전국을 돌아다니다 결국 11년 해인사 한 스님의 권유에 따라 이 곳에다 터를 잡았다.
여씨는 지난해까지 자신이 만든 찻그릇을 세상에 내놓거나 알리기를 거부해왔다. 스님들이 찾아와 다담(茶談)을 나누며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찻그릇을 훔쳐간다", "속가에 되나누는 보시"라며 놓고 간 그릇값이 고작.
하지만 스님들의 성화에 못이겨 지난해 서울 토아트, 백상기념관 등에서 첫 세상 나들이를 했다. 인기는 폭발. 여씨는 "세상 사람들이 사기꾼(?)한테 속고 있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여씨의 두번째 세상나들이는 오는 12월7일부터 12일까지 일주일간, 대구 대백프라자 갤러리에서 열린다. 10여년간 속세를 떠나 빚어 온 찻그릇 100여 점을 선보인다.
손수 황토를 발라 초막을 지어 둥지를 틀고, 장작가마로 찻그릇을 구워 차향(茶香)에 묻혀 사는 여씨는 도인(陶人)일까 도인(道人)일까. 그를 만나고 내려오는 길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않는 질문이었다. 합천·정광효기자 khjeong@msnet.co.kr
사진 : 온기 가득한 장작가마 안에서 인고 끝에 탄생한 찻그릇들을 끄집어내고 있는 여상명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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