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연행 30년 추적 일본인 르포작가 인터뷰
"조선인 강제연행을 일본 정부에 요청하는 것에서부터 한반도로 가 직접 연행자를 색출하는데 이르기까지 아소(麻生)탄광이 앞장섰습니다"
조선인 강제연행의 실상을 30여년간 추적, 폭로해온 일본인 르포 작가 하야시( 林) 에이다이씨는 3일 연합뉴스와 전화 인터뷰를 갖고 일제가 조선인을 강제연행, 혹사시켰던 과정에서 '아소탄광'이 담당했던 주도적인 역할을 상세히 공개했다.
'아소광업소'로 출발한 아소탄광은 최근 일본 정부 개각시 외상에 임명된 아소다로(麻生太郞.65)의 증조부인 아소 다키치(麻生太吉)가 창업, 지난달 31일 일본 정부 개각 때 외상으로 임명된 아소 다로(麻生太郞.65)에게까지 가업(아소 시멘트)으로 이어져 왔다.
하야시씨는 "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 젊은이들이 전장으로 징발되자 아소탄광을 비롯한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지역의 탄광들이 일본 정부에 조선인을 징용할것을 촉구하는 대대적 캠페인을 벌였다"며 "후생성이 이를 받아들였고 조선총독부에요청, 1939년부터 연행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아소탄광의 경우는 당시 한국에 살던 일본인을 노무 담당자로 채용, 탄광에서 출장보낸 일본측 인사담당자와 함께 연행대상을 샅샅이 조사, 데려올 정도로 용의주도했다"며 "한국에 사는 일본인 노무 담당자들은 어느 면, 어느 군에, 어느 정도의 노동인력이 있는 줄 꿰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은 매우 효율적이었다"고 지적했다.
하야시씨는 "이러한 치밀한 방법을 쓴 곳은 후쿠오카 지역 탄광들 가운데 아소탄광이 유일했다"고 덧붙였다.
하야시씨에 따르면 아소탄광이 한반도로 눈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1939년 강제연행 이전부터 이 탄광이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광부로 많이 채용, 이들의 노동력이 뛰어나며 무엇보다 임금을 적게주고도 혹사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임금차별과 각종 인권유린 등에 견디다 못한 조선인 광부 400여명은 최저임금 보장 등을 요구하며 기어이 1932년 총파업을 단행했다. 파업은 인근 탄광으로번져가 다른 조선인 광부 300여명이 가세, 3주간 계속됐다. 탄광 사상 첫 총파업에놀란 아소탄광측은 임금인상 등 요구를 일부 들어주었으나 파업 주동자 4분의 1을해고했다.
이 파업의 여파로 아소탄광은 경영위기에 처할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고하야시씨는 전했다. 아소탄광측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조선인 노동자를 다루는 '노하우'를 익혔고후쿠오카 지역 탄광들이 조선인 노동자의 징용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벌이자 앞장서기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는 당시 광부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 채광량이 크게떨어져 선박과 열차 등 군수장비를 가동하기 곤란하게 되자 탄광들의 요구를 수용했다고 하야시씨는 설명했다.
당시 아소탄광측의 노동조건이 극히 열악했다는 사실은 강제연행된 노동자들의다양한 증언 외에도 후쿠오카현 당국의 내부자료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후쿠오카현 옛 내무성 특별고등과의 보고자료(1945년 6월말 현재)에 따르면 후쿠오카 탄광들의 40여개 탄광들에서 노역한 조선인 연행자 총수는 11만 3천61명으로이 가운데 51.7%인 5만8천471명이 혹사 등을 견디다 못해 달아났다.
특히 아소탄광의 경우 연행자 숫자가 7천996명으로 단일 탄광으로는 가장 많았고 도망자 역시 4천919명(61.5%)으로 1위였다. 사망자도 56명으로 가장 많았던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재일본 조선인 후쿠오카 청년상공회의소 등 지역 민간단체와 관계자들은후쿠오카 당국의 연행자와 도망자, 사망자 숫자 등은 실상에 비하면 매우 축소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아소탄광에서 노역했던 장손명(張遜鳴.1919년생.작고)씨는 생전 하야시씨에게남긴 증언에서 많은 동료들이 작업 중 사고 또는 구타로 사망했다고 전하면서 "시신을 검사하는 것은 탄광의 청원순사나 갱내담당자, 탄광의사 등으로 이들은 사망 책임을 우리의 부주의로 전가하고 유족들이 찾아오기 전에 시신을 화장.매장해버렸다" 고 증언했다.
하야시씨는 "아소탄광은 온갖 거짓말과 협박 등을 통해 조선인을 연행해온 뒤돈도,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대거 탄광에서 도망치자체포하려는 특별고등경찰까지 동원될 정도였다"며 "아소탄광은 조선인 연행자의 피땀으로 부를 축적했다"고 설명했다.
지금도 아소탄광 인근에 살고 있는 하야시씨는 30여년간 조선인 강제연행을 집요하게 추적, '강제연행.강제노동-지쿠호(筑豊) 조선인 광부의 기록', '조선해협', '없어져버린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청산되지 않은 쇼와(昭和)' 등 책자를 통해 폭로해왔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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