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폐장 투표 D-1-경주·포항·영덕 현지표정

입력 2005-11-01 13:32:26

"최후의 순간까지" 막판 홍보전 戰時방불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장(방폐장) 주민투표를 40시간가량 앞둔 31일 경주, 포항, 영덕 등 3개 지역에는 비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지난해 7월 30일 주민투표법이 발효되면서부터 시작된 싸움은 완전 비상상황이었다. 유치 찬반 단체 사무실 주변은 물론이고 시내 곳곳에서 파랗고 노란 깃발과 현수막 등으로 도배한 양측 홍보차량이 확성기를 울려대는 모습은 '전시(戰時)'체제, 바로 그것이었다.

◆"아! 양남·양북, 감포여…."-경주

백상승 시장 등 경주의 찬성 측 지도부는 나흘간의 단식농성 종료를 선언하자마자 서둘러 '3개 읍면'으로 달려갔다. 경주에서는 월성원전 인근의 감포읍과 양남면, 양북면을 합쳐 '3개 읍면'으로 부르는데 이들 지역은 경주지역 찬성 단체에게 지금껏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분류되는 곳이다.

지난 주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경주지역 평균 찬성률은 80.9%였지만 감포 57.1%, 양남 51.6%, 양북 50.0%로 경주지역 25개 읍면 중 찬성률에서 나란히 23, 24, 25위를 기록했다. 찬성 측의 입에서는 '아, 3개 읍면이여'라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3개 읍면의 찬성률을 평균치 정도로만 올리면 유치는 확정적이라고 판단한 지도부는 31일 하루 동안 인력, 조직력, 홍보물 등 모든 것을 이곳에 다 쏟아부었다.

이의근 도지사도 31일 오후 4시 30분쯤 헬기를 타고 양북면에 도착했다. 이 지사는 양남·양북 반대주민들을 연쇄접촉하며 경주 유치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이어 이 지사는 시민유치궐기대회가 열리는 경주역으로 이동하는 강행군을 펼쳤다.

이날 오전 11시쯤 양북면 어일시장. 여성최고경영인회 소속 '여사장님'들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들이 장보러 나온 현지인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며 "찬성하세요"라며 호소전을 펼쳤다. "힘드시죠"라며 격려하는 시민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한 찬성 측 인사는 "며칠 만에 우리 편이 많이 늘었다"며 웃었다. 하지만 반대 측 인사들이 뒤따르면서 양측 간 신경전도 계속되고 있었다. 50대 중후반의 한 주부는 "눈치 보여서 말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라며 서둘러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한 할머니는 "찬성표 찍어달라고 손을 붙잡고 늘어지는 이들이 하루에도 서너 번씩 지나갔다"며 "저 사람들이 애쓰는 게 안 돼 보인다"고 했다. 감포와 양북 간 경계지점 근처의 한 횟집 주인은 "상호를 밝히지 말라"면서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민심이 요 며칠 사이 많이 흔들리는 것 같다"고 했지만, 대놓고 "절대 안 된다"고 쏘아붙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오후 3시쯤 경주시청. 군산에서 충격적인 연락이 도착했다. 걷어내겠다던 현지의 지역감정 조장용 현수막은 여전하고 이날 오후 열린 군산지역 유치집회에서는 입에 올리기에도 섬뜩할 정도의 현수막과 홍보물이 뿌려졌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설마"하면서도 "이럴 수는 없다"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군산에 내걸린 현수막 내용이 경주시민의 단합과 반대파에서 찬성파로의 이동을 유발하고 있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오기도 했지만 "해도 너무한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이들이 많았다.

경주 시내는 상대적으로 노인홍보요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6·25 참전용사회 소속 할아버지 두 분은 쌀쌀한 날씨에도 덮개도 없는 1t 트럭 적재함에 앉아 깃발을 휘날리며 경주유치 당위성을 알리는 가두방송을 했다. 이들은 "손을 흔들거나 '찬성!'하며 답을 보내주는 젊은이들이 제일 반갑다"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날 밤에도 경주시청 근처의 국책사업경주유치추진단 사무실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투표 종료시까지 쉬지 않기로 했습니다. 원칙도 기준도 없는 정부가 밉지만 그래도 시작한 일이니 끝맺음을 잘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더 투표장으로-포항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말고 꼭 투표장에 갑시다"

투표일을 하루 앞둔 1일 아침 출근길. 포항시 주요 간선도로 교차로에는 방폐장 유치 홍보 어깨띠를 두르거나 피켓을 든 사람들이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지금까지는 요일을 정해 활동하던 읍·면·동 자생단체들이 모두 거리로 나선 탓이다.

대이동 교차로에서 만난 대이동 청년회원 강태철(45) 씨는 "포항이 타 시·군에 비해 여론조사 결과 찬성률이 약간 처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방폐장이 포항에 와야 대구·경북이 상생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전 9시쯤 덕수동 포항시국책사업유치위원회 사무실 앞 도로. 방폐장 홍보 봉고차량 7대가 평소보다 1시간쯤 빨리 도착, 방폐장 유치 당위성을 담은 내용으로 개사한 '휘파람' '반갑습니다' '군밤타령' 등의 노래를 토해내고 있었다. 자원봉사자 이원희(50) 씨는 "며칠 동안 홍보하러 다니다 보니 목이 쉬고 발이 부르텄지만 마지막날인 만큼 밤 늦게까지 주민들을 설득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31일 포항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방폐장 포항 유치 범시민 궐기대회에 예상보다 적은 5천여 명이 참석해 실망한 유치찬성 측은 그러나 "포항은 80%가 외지인이라 토박이가 많은 3개 시·군과 결집력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며 "하지만 투표율만 높으면 찬성률은 자동 높아질 것"이라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현재 포항시가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은 포스코를 비롯한 철강공단근로자 및 자영업자들의 투표 참여 여부. 이들이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갈수록 포항 현 경제와 미래를 위해서는 방폐장 유치가 필수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영일만횟집 주인 김영만(45) 씨는 "언론을 통해 군산이 원색적으로 지역 감정을 조장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그에 비해 포항, 영덕, 경주는 너무 점잖게 유치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2%가 부족하다-영덕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저쪽(군산)은 진짜 97% 찬성인가요?"

31일 영덕군민운동장. 방폐장 영덕유치 필승 다짐대회에 참석한 군민들은 하나같이 다른 지역의 찬성률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상당수 주민들은 연일 지역감정으로 몰아치고 있는 군산지역에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영해면 김병학(56) 씨는 "이거(국책사업 주민투표) 두 번만 하면 나라 망하겠다. 무슨 수가 있어야 하지 않나"며 주민투표라는 공을 던져 놓고는 손을 놓고 있는 정부를 비난했다.

1일 오전 9시, 범영덕군방폐장유치위원회 사무실. 한시간 반 전부터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군민들이 어느새 200여 명이 넘었다. 20대부터 70대까지 연령층도 다양했고, 전직 공무원부터 농어민, 산촌인까지 가세했다. 이들은 "그동안 고생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오늘 하루만 우리 최선을 다하자. 2% 고지를 넘어야 한다. 지금 선두인데 2%만 더 찬성률을 올리면 안심이다"라는 박경열 범영덕군유치위 총괄본부장의 설명을 듣고 10시부터 시작된 가두행진에 참여, 지지를 호소했다. 이들은 이날 점심도 간단한 간식으로 때우고 모두들 오후 늦게까지 군내 9개 읍면을 돌았다.

1일 영덕읍 등 9개 읍면에는 마지막 지지를 호소하는 현수막과 플래카드도 곳곳에 등장했다. 또 최종 개별 접촉도 시도됐다. 찬성 주민들은 "강구 대게상가여 돌아오라"는 등 반대가 심한 한농연 영덕군지부 회원들과 지품면 청지회 회원, 축산면 경정리 주민 등에게는 "일단 유치하고 나중에 의논하자"며 설득했다.

남효수 영덕국책사업추진위원장은 "영덕은 당초 20여년 동안 이 사업에 반대한 지역이어서 처음에는 어려움도 많았지만 이제는 다 이해하고 영덕을 우리 손으로 살려보자는 분위기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면서 "주말인 30일부터 다른 지역을 따돌리기 시작했다"고 자평했다. 그는 "빈사상태의 경기로 쓰러지기 직전인 영덕은 방폐장 말고는 대안이 없다"고 말하고 "영덕군민들이 현명한 선택을 할 것으로 믿으며 5% 이상 차이로 승리, 다른 소리가 안 나도록 압도적 지지를 보내 달라"고 마지막으로 호소했다.

영덕·최윤채기자 cychoi@msnet.co.kr

포항·임성남기자 snlim@msnet.co.kr

경주·박정출기자 jcpark@msnet.co.kr

사진: 한국전 참전용사회 소속 할아버지들이 트럭 적재함에 앉아 방폐장 유치 홍보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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