瑞雪로 만난 순백의 詩心
유난히도 눈(雪)이 인색한 삶의 공간 대구에서 눈으로 시작한 시동인이 '서설'(瑞雪)이다. 시(詩)와 삶을 알차게 살고 싶은 마음들을 모았던 지난 1989년 1월. 상서로운 눈이 내린 날 만났다고 '서설'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로부터 17년, 이만한 연륜의 순수 여류 시동인이 또 있을까. 동인들을 이토록 오랜 세월 붙잡아 온 질긴 끈은 무엇일까. 특별한 공존의 지향점을 내세우지도 않았고, 어떤 주의나 주장을 이념으로 못박은 일도 없었는데….
▲89년 결성 동인지 16집
그것은 일상의 진솔함을 시로 승화시키며 서로의 성장을 확인하고 격려해 온 시심(詩心)이었을 것이다. 또 서설처럼 모든 것을 포근히 안고자 했던 어머니의 가슴이었을 것이다. 서설이 내리던 날 순백의 언어로 시심을 처음 묶었던 사람들은 정재숙, 황영숙, 박주영, 성명희, 전은경, 김영희 시인이었다.
그러다 전은경, 김영희 시인이 도중 하차하고 이듬해 문차숙 시인이 새 식구로 들어왔다. 5명의 회원으로 동인지 6집까지 발간하다가 1995년 구양숙 시인이 한식구로 합류하면서 동인이 다시 6명으로 늘어났다.
동인이 결성된 지 꼭 10년 만인 1999부터 이태동안 황영희, 박숙이 회원이 합류하면서 서설은 문단의 주목을 받는 동인으로 거듭났다. 주변의 부러움과 시샘을 함께 받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두가 등단을 했고, 꾸준히 시를 쓰며 해마다 동인지를 내고 있다.
서설이란 이름으로 함께 지내오면서 시력에 못지않은 우정도 많이 쌓았다. 가장 연장자인 정재숙 시인은 언제 봐도 믿음직한 친언니같다. 처녀 때 들어온 문차숙 시인은 어느덧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주부…어머니…새로운 시심
서설은 매월 넷째 수요일 정기 모임을 가진다. 시인이라는 것을 빼고 나면 대구에 사는 주부들의 친목모임과 다를 게 없다. 삼랑진 만어사를 찾다가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었던 고생담은 문학기행 얘기가 나올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메뉴이다.
거제도 남쪽에 있는 지심도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동백꽃과 휘어진 노송 가지 사이로 떠오르던 일출의 감동도 잊을 수가 없다. 지난 2001년 겨울 소년분류심사원에서 주최했던 백일장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온다.
순간의 실수로 '죄인'이란 표찰을 달고 있었지만, 집 나간 엄마를 그리며, 몸이 아픈 아빠를 걱정하며, 할머니와 동생이, 그리고 친구가 보고 싶어 눈물 짓는 소년들의 글을 읽으며, 시인이기에 앞서 엄마로서 오래도록 울었던 기억이 새롭다.
▲냉철한 비평도 포근함으로
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밤이나 눈이 내리는 겨울밤, 하다 못해 달이라도 휘영청 밝은 밤이면 시심에 주흥까지 곁들여 노래방을 찾기도 한다. 황영숙 시인이 문병란의 시에 가사를 붙인 '직녀에게'를 부르면, 박주영 시인이 '그대 그리고 나'로 화답을 한다. 옛노래 '번지없는 주막'의 노랫말이 그렇게 가슴에 와닿을 줄 몰랐다. 이제 나이가 들었나보다.
지난 세월 어쩌면 삶이 주는 아픔보다 시로 인한 가슴앓이가 더 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이 그렇듯 시가 그렇듯, 아픔 뒤에는 눈부신 희열과 열림이 흰 눈처럼 소리없이 내려 시인의 가슴에 축복처럼 쌓이곤 했다.
더러는 문학토론은 물론 서로에 대한 냉철한 시 비평도 뒤따랐다. 간혹 마음을 다칠 일도 있었지만, 내리면 어느새 녹고 마는 눈 같은 마음들이어서 지금껏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서설'이다. 어느 시인이 "동인의 운명은 해체"라고 말했지만, 서설 동인들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서설'이란 문학의 끈을 놓지 못할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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