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편지-우려되는 자퇴 대란

입력 2005-10-25 10:08:26

"이번 중간고사에서 아이가 영어 과목 답을 한 칸 내려 썼습니다. 평소 95점 이상 나오던 것이 60점을 못 넘었어요. 1학기 때도 기대만큼 못 나온 과목이 두세 개 있는데 이런 식으로 누적되면 원하는 대학 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기말고사에서 만회가 안 되면 자퇴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언제쯤이 좋을까요?"

이메일로 한 고교 1학년생 학부모가 도움을 청했다. 전화를 걸었다. 벌써 무슨 자퇴 얘기냐고 물었더니 1학년이 다 끝나가는 마당이니 그럴 때도 되지 않았냐고 했다. 그래도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중간·기말고사 합하면 모두 열두 번인데 그 중에 한두 번, 그것도 한두 과목 망쳤다고 자퇴를 생각하는 건 너무 급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말이 쉬워 시험 한 번, 과목 하나가 작은 비율이라고 하는데, 당사자 입장에서 생각해 봤냐고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는 1학기 때 '내신 대란'이라며 그렇게 호들갑을 떨던 언론이 요즘은 왜 내신 문제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느냐고 힐난했다.

사실이 그랬다. 1학기 중간고사 때는 전국 모든 언론이 마치 학교가 뒤집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내신 성적 기사를 앞다퉈 기사화했다. 내용을 차별시키려 친구의 공책을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둥, 공책을 빌려주지도 않는 삭막한 교실이 됐다는 둥 허위와 과장까지 서슴지 않았다.

냄비처럼 금세 달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식는 게 우리 언론의 속성. '성적 부풀리기 의혹이 드러난 교육청에는 정부의 특별교부금을 절반까지 삭감하고, 90점 이상 학생 비율이 15% 이상인 고교의 관계자들은 문책한다'는 교육부와 교육청의 발표가 나오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최근 전국 고교 1학년들의 석차 등급 비율이 1등급 3.87%, 2등급 10.94% 등으로 기준 비율 이내의 적정 수준을 지키고 있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쯤이면 내신 문제는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우려되는 것은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라 잠복기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그것도 속으로 점점 곪으면서. 곪은 것은 터지게 마련. 내년 여름방학쯤에 '자퇴 대란'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하나 둘 나오고 있다. 고교 생활의 절반이 지난 시점에서 내신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은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자퇴뿐이라는 것이다. 검정고시를 치고 이듬해 수능에 응시하려면 그때가 적기란 점도 설득력을 더한다.

게다가 2008학년도 대학 입시의 구체적 내용, 대학별 전형 방법 등이 그때까지 확정, 발표될 것으로 기대하기도 어렵다. 다양한 경로를 통한 대학 진학이라는 2008 입시의 또 다른 원칙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확인하고 거기서 가능성을 찾을 수 없다면 내신이라는 외길에서 뒤로 처진 학생들에겐 대열을 이탈하고픈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학생 스스로 학교를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가 정상일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을 예견해 사전에 경보를 내리고 대책을 모색하는 시스템도 갖추지 못했다면 상황은 더욱 암울하다. 언론에서는 잠복했다고 해도 학교 현장에서는 진행형이다. 책임 있는 이들이 귀를 더 넓게 열고 눈을 더 크게 뜨기를 바랄 뿐이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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