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난폭토끼'라는 표제의 방송을 인상깊게 시청한 적이 있다.
토끼―하면 일반적으로 떠올려지는 느낌들이 있다. 작고 연약함, 유순하고 잘 놀람, 날쌘 반면 지구력이 부족함, 귀엽고 보송보송함 따위가 그것들이다. 그런데 그 방송에서 취재한 모 농원의 토끼군(君)은 그러한 통념들을 깡그리 뭉개 버리는 돌연변이종으로 우선 외모부터가 남달랐다. 보통 토끼의 두 배는 됨직한 덩치에다 갈색 섞인 누런 털로 덮인 모습은 얼핏 견공(犬公)의 위용을 지닌 듯 했고 유난히 툭 불거져 번득이는 검은 눈망울은 독수리의 눈매를 방불케 했는데, 녀석의 비범성을 결정적으로 말해 주는 외관적 특성은 그 앞니에 있었다. 어떻게 연마했는지 선사시대 돌도끼처럼 날카롭게 보이는 두 개의 앞니가 턱밑에 닿도록 길다랗게 뻗어나 있는 것이 자못 위협적인 카리스마를 뿜었다. 거기에 녀석의 악명 높은 성질이 합세하여 빚어낸 결과는 매우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녀석을 길러 온 주인을 포함해서 그 농장을 찾았다가 녀석에게 물어 뜯겨 정강이에 이빨 구멍과 함께 피멍이 들고 바지 가랑이가 넝마처럼 뜯겨 나간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 축산농원인 그곳에서 녀석에게 위협받아 제 자리에서 내쫓긴 오리와 닭들 때문에 계사를 새로 마련해야 했으며, 녀석의 전제군주적 독점욕 때문에 다른 수토끼들이 도무지 홀아비 신세를 못 면하는 비극적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녀석이 공격을 하는 데는 때(時)나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녀석은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다가 느닷없이 덤벼들어 상대를 작살내곤 했다. 상대가 도망을 치면 집안으로든 들판으로든 악착같이 쫓아가 이빨을 박고야 말았다. 심지어는 토끼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수중 추적도 불사했다.
어려서부터 황당무계한 무협지풍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는 그 '토끼불패' 다큐를 킬킬거리며 보다가 그 토끼의 주인이 취재진의 마지막 질문에 답하는 내용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사나운 말썽꾼을 뭐하러 키우시는 거죠?"
"종자를 받으려고요. 이 녀석의 종자를 많이 번식시켜 사나운 토끼들을 인근 야산에 풀어놓으려고 합니다. 요즘 이 근방에 들고양이떼가 끓어서 농원들 피해가 크거든요."
들고양이떼,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닭장이나 오리장 또는 토끼장을 습격하여 쑥대밭을 만들어 놓는 비적떼이다. 그들이 한 번 휩쓸고 가면 한철 내내 공들인 짐승농사가 엉망이 된다. 비적이 창궐하는 시기는 난세에 다름 아니다. 예로부터 난세에 호걸이 나는 법. 그 축산농가 일대에서 활약이 곧 기대되는 호걸은 난폭토끼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방약무도하고 독종이며 자신의 영역을 위협하는 존재들을 참지 못한다. 그들은 일단 공격의 대상을 정하면 자신의 안위 따윈 아랑곳없이 목표를 향해 돌진한다. 천방지축이고 막무가내이고 무지막지하다. 그러나 그들은 용맹하다. 그 물불 가리지 않은 용맹에 교활하고 조직적이며 우세한 무기(포식동물의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 등)를 지닌 들고양이떼도 주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한낱 토끼지만 그들은 굴하지 않는 투혼으로 들고양이들한테 당당히 맞서는 견제세력이 될 것이다.
난폭토끼. 그 어처구니없는 짐승은 내 안 깊숙이 잠들어 있는 어떤 야성을 흔들어 깨운다. 세상을 보라. 온통 비적떼로 들끓지 않는가! 세력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주권 침탈을 예사로 아는 정치 비적떼, 자신들의 이윤극대화를 위해 세계화의 미명 아래 노동과 생명의 억압을 일삼는 경제 비적떼, 인간의 영혼을 좀먹는 저질 문화를 이식하고 퍼뜨리는 문화 비적떼, 사이비성 기이지론(奇異之論)으로 혹세무민하는 종교 비적떼, 선진 산업공학의 파급이란 명분 아래 생태계 훼손을 마다 않는 환경 비적떼,...... 그야말로 제적백도(諸賊百盜)의 시대가 아닌가!
이러한 세상에서 순응적 자세로 꾸역꾸역 살아온 나는 요즘 난폭토끼의 그 싱싱한 야성이 몹시도 그립다.
구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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