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가을의 단상

입력 2005-10-21 11:03:20

전시실에서 일반인들이 설치미술이나 낯선 미디어 작품을 보고 '신기하다'라는 반응 외에 특별히 깊은 인상을 받는 장면을 목격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작가들이 다루는 주제가 대부분 일상적이지도 않거니와 웬만한 영상에는 놀라지 않을 만큼 미디어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이 설치된 현장에서 관객의 즉각적인 반응을 유도하는 것은 작가들에게는 어려운 숙제이며, 능력이기도 하다.

몇 해 전 미술관에서 선보인 다츠오 미야지마(Tatsuo Miyajima)라는 일본 작가의 전시에서 관객들의 놀라운 반응을 목격할 수 있었다. 전시가 월드컵 시즌과 맞물린 탓에 많은 관객을 동원한 전시는 못되었지만, 그는 세계적 명성에 걸맞게 보는 이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였다.

관객들은 소형 카메라가 설치된 컴퓨터에 않아 화면의 지시대로 진행해 나간다. 우선 가장 근사한 포즈로 자신의 얼굴을 찍어 화면에 띄우고 이름을 적는다. 그러면 컴퓨터로부터 자신이 죽기 원하는 날을 입력하도록 요구받는다. 이백 년 뒤를 적는 사람에서부터 다음날을 적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웃음이고 마지막 엔터(Enter)키를 누르는 순간 삶의 남은 시간이 초단위로 화면에 표시되고 그 날짜가 다가올수록 화면의 영상은 흐려진다. 이때부터 관객의 표정은 무척 복잡해진다. 재미로 시작한 것이 어느새 죽음을 떠올리게 하고,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어느새 거리를 물들인 계절의 정령은 그 아름다운 모습 뒤로 내가 이미 소멸의 계절 한가운데 있음을 알린다. 바람에 흩날리던 낙엽이 대지에 내려앉을 때마다 그 소리는 마치 일상에 파묻혀 버린 나를 일깨우는 거대한 종소리처럼 들린다. 오고 가는 계절은 우리 삶을 비추는 투명한 거울이건만, 잿빛 도시에 둥지를 튼 우리들은 계절의 변화조차 모른 채 오늘도 뿌연 무채색의 공간을 부유한다. 무표정한 도시는 수목을 거둬냈고 그만큼 계절은 우리 삶에서 멀어져 간다.

이두희 경주아트선재미술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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