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의 사상기행-(5)향가에 드러난 신라인의 우주적 상상력

입력 2005-10-13 10:42:34

오늘은 이 지역의 오랜 사상적·문화적 전통의 '알짬'을 이루고 있는 신라인들의 세계관과 우주관을 담고 있는 향가에 나타나는 우주적 상상력, 생태학적 감수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헌화가'는 천민신분의 늙은 노인이 젊은 유부녀인 수로부인을 향해 벼랑 아래의 꽃을 꺾어 바치는 사랑 노래이다.

고대적 에로티시즘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노인은 붉은 암소를 타고 나타난다. '붉은 암소'는 상징이다. 그것은 '유혹'을 뜻한다. 따라서 노인의 사랑은 정신적이고 아가페적이기보다 에로틱하다. 차라리 육욕적이다.

노인이 아주 새파랗게 젊은 유부녀에게 유혹의 편지를 띄운 것이다. 그런데도 전혀 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묘하게도 아름답다는 느낌이 온다. 젊은 수로부인을 향해 유혹을 보내는 늙은 노인의 모습은 매우 역설적이다. 이 역설을 잘 해석해야 한다.

향가를 논리적인 지문으로만 해석하면 하늘의 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에 갇혀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서로 반대되는 극과 극이 합쳐지면서 웃음과 눈물, 비극과 희극, 자연과 초자연, 주관과 객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이것과 저것의 대립이 아니라 하나로 얽히고 설키는 고대적 관용의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한다.

늙은 노인이 젊은 유부녀에게 느끼는 에로틱한 감정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것까지 용인하는 관용은 마침내 육체적인 것만도 정신적인 것만도 아닌 그러면서도 두 세계를 모두 아우르는 에로티시즘의 승화를 가져온다. 이것이 바로 신라인의 세계관이요, 우리 풍류문화의 핵심이다.

이러한 신라적 전통을 끌어들여 자기 시의 세계로 멋들어지게 뽐낸 현대 시인이 바로 미당 서정주다. 미당의 '해일(海溢)'이라는 시를 한번 보자. 내가 젊은 시절부터 참 좋아하는 시이기도 하다.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서 삼대 울타리 틈으로 새어 옥수수밭 속을 지나서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이 우리 외할머니네 집에는 있었습니다. 이런 날 나는 망둥이, 새우 새끼를 거기서 찾노라고 이빨 속까지 너무나 기쁜 종달새 새끼소리가 다 되어 알발로 낄낄거리며 쫓아 다녔습니다. 항시 누에가 실을 뽑듯이 나만 보면 옛날이야기만 무진장 하시던 외할머니는, 이때에는 웬일인지 한마디도 말을 않고 벌써 많이 늙은 얼굴이 엷은 노을빛처럼 불그레해져 바다 쪽만 멍하니 넘어다보고 서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왜 그러시는지 나는 미처 몰랐습니다만, 그분이 돌아가신 인제는 그 이유를 간신히 알긴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다니시던 어부로, 내가 생겨나기 전 어느 해 겨울의 모진 바람에 어느 바다에서인지 휘말려 빠져버리곤 영영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채로 있는 것이라 하니, 아마 외할머니는 그 남편의 바닷물이 자기 집 마당에 몰려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어져 있었던 것이겠지요.

자기남편을 바닷물로 보았다. 이상한 것은 수십년 전에 죽은 남편의 실물도 아니고 육체도 아니고 바닷물이 들어선 걸 보고 얼굴이 붉어졌다. 이 정도면 미당은 거의 귀신의 경지쯤 가본 사람 같지 않은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서정주 만세'를 부르기도 한다만.

그러나 그게 어디에서 온 것일까? 바로 이 지역의 오랜 전통, 신라 향가의 세계로부터 유래한다.'헌화가' 계통이다.

또 '해일'이라는 시의 형식도 의미심장하다. 마치 할머니가 옛이야기를 손자에게 들려주는 것처럼 산문설화시의 형태로 되어있다. 이러한 형식이 어디에서 나오나?.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와 그것에 관한 유래를 구전설화로 표현하고 있는 바로 그 형식이다. 이쯤 되면 여러분은 '서정주 만세'만 부를 것이 아니라 '월명 만세' '일연 만세'도 함께 불러야 하지 않을까.

다음으로 융천사의 '혜성가'를 살펴보자. 어린 화랑 셋이 손잡고 금강산을 여행하는데 '하늘의 별들이 내려와 길을 쓸어주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우주와 지상의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따뜻한 관계가 아름답게 드러나고 있다. 비슷하게 우주여행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와 한번 비교해 보자. '어린왕자'는 참으로 멋있는 작품으로 지금도 우리 독서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인간과 우주사이의 새로운 관계맺음에 관해 다루고 있다. 새로운 우주관의 씨앗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끝부분에 이르면 우주 속의 인간인 어린왕자는 참으로 외롭고 쓸쓸하다. 쓸쓸한 나머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마치 '우주고아'랄까 '우주미아'가 되어 버린 듯하다.그런데 혜성가는 어떻나?. 쓸쓸한가?. 쓸쓸하기보다 우주의 별과 금강산과 손을 잡고 길을 가는 어린 세화랑 사이에서 '하늘의 별이 길을 쓸어준다'는 드넓고도 따뜻한 우주적 사랑이 드러나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 비록 문학적 상상이라고 하더라도 이 우주와 세계에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느껴지게 한다. 이것이 앞으로 열어야 할 우주와 지구와 인간 사이의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사귐, 따뜻한 우주적 친교의 관계가 아닐까.

인간이 아닌 우주의 별이 스스로 영적으로 살아나서 우정을 표시하는 모습에서 오늘 생태위기에 직면한 현대가 갈망하고 있는 따뜻한 새 우주의 비전을 찾아야 한다.

이렇듯 향가에는 현실과 초현실, 이승과 저승, 나와 너, 이것과 저것 등 모든 대극적인것 사이를 무시로 자유롭게 넘나들고 거리낌 없이 초월하는 세계관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화랑이자 승려였던 월명사의 향가를 보자. 하늘에 해가 두개 동시에 나타나는 괴변-생태학적 재앙이 일어났을 때 '도솔가'라는 향가를 지어 부르자 괴변이 사라진다. 또 월명은 피리의 명인이기도 했는데 월명이 한밤 대금을 불면 하늘을 가르던 달이 피리소리에 감동해서 딱 멈춰버렸다는 내용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이것이 지난번에도 말했던 진정한 예술이 목표로 하는 미의 최고이상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월명사의 "제망매가(祭亡妹歌)를 한번 읽어 보자.

생사의 길은

여기 있으니 두려워하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가느냐

어느 이른 가을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가지에 나서

가는 곳 모르는구나

아!

미타찰에서 다시 만날 나는

도닦아 기다리려나

이승에 있는 나와 미타찰, 즉 도솔천이라는 저 먼, 저승에 있는 누이 사이에 큰 죽음의 간극은 전혀 없다.

마치 손을 뻗으면 금새 닿을 듯 망자는 이 우주의 가까운 한 하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이렇듯 이승과 저승은 차이가 없고 너와 나 사이에도 차이가 없으며 눈물이면서 웃음이고, 슬픈듯 하면서 한없이 기쁜 약속의 표현이 자유자재로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짧은 향가 한마디 노래가 우주적 변괴를 치유할 수 있었다. 이것이 '쓰나미'로 상징되는 생태적 대재앙의 시대에 요구되는 새로운 예술적 상상력이 아닐까.

예컨대 지금은 지구 반대편에서 사는 한사람이 저녁노을 무렵 짓는 슬픈 탄식이 지구 이쪽에 있는 내 마음 속의 슬픈 정동 속에 그대로 느껴져야 하는 시대이며 지구 생태계의 한 물방울의 고통스러운 오염은 물론, 저 먼 우주행성으로부터 한밤중에 문득 뚫고 올라오는 새파란 어떤 광물의 빛도 상상의 빛으로 내 내면세계에 연속될 수 있어야 작품의 초벌구상이라도 할 수 있는 지구촌 우주촌 시대다.

지구 전체와 먼 나라들, 그리고 사람들 그 속의 더 크고 넓고 오래고 깊은 내면세계의 기억과 예감들 아득한 과거와 미래, 이 모든 것이 연속되는 광활한 세계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야 그런 지구적, 우주적, 심층 무의식적, 통시간적 감수성과 상상력이 열린다. 이런 상상력이 있어야 인간, 동식물은 물론 지구와 우주의 무기물, 흙과 물과 티끌 속에서 까지도 그 핵심에 살아있는 마음과 텔레파시로 소통하며 오염을 걱정하고 그 질병을 아파하는 마음이 열린다. 이것이 바로 천지공심이요, 우주사화적 공공성인데, 이런 마음 없이는 인류와 동식물과 무기물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없고 오염으로부터 근본적으로 회생 시킬 수 없다.

이렇듯 신라인들의 향가는 오늘도 우리에게 무궁한 상상력의 바탕을 열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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