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지휘권 첫 발동은 다목적용

입력 2005-10-13 09:00:19

'여론 보기' 공안 수사 제동…검찰 수사권 훼손 논란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검찰이 수사 중인 구체적사건에 대해 사상 처음으로 장관의 수사지휘권을 발동한 것은 여론 눈치보기식 수사관행 탈피 등 다목적용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법무부 장관의 수사 지휘권을 규정한 검찰청법 제 8 조는 그동안 구체적사건에 대해 한 번도 적용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검찰 수사권 독립 훼손 논란이거세게 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 조항은 '법무부 장관은 검찰 사무의 최고 감독자로서 일반적으로 검사를 지휘·감독하고,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한다'며 검찰총장에대한 지휘 권한을 명시하고 있다.

천 장관이 지휘권을 발동한 것은 검찰이 이달 7일 경찰에서 강정구 교수 사건자료와 구속 의견서를 넘겨받은 뒤 '기록 검토 중이다'라는 이유로 의견 표명을 미루다 '구속 의견'을 올렸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여론 '눈치보기' 정면 돌파 = 천 장관이 검찰 수사에 관여하지 않는 '관행'을깨뜨리고 사상 처음으로 수사 지휘권을 발동한 데는 공안 사건 처리 때마다 여론을민감하게 의식해왔던 검찰의 태도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천 장관은 수사지휘를 내리면서 "증거인멸, 도주 우려가 있는 피의자나 피고인을 구속하도록 규정한 형사소송법 정신과 기본원칙은 공안 사건에도 달리 적용될 이유가 없고 여론 등의 영향을 받아서도 안된다"고 밝혔다.

한국전쟁을 북한의 통일 전쟁으로 평가한 강 교수의 학문적 성취를 구체적으로검토하거나 논의하지도 않고 일부 발언만을 문제 삼아 구속 수사하는 것은 현행법정신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강 교수에 대해 불구속 수사 지휘를 내린 것은 천 장관이 취임 이후 줄곧 '인권수사'를 강조해왔던 점을 고려하면, '인권수사' 의지에 대한 첫 시험대라는 면에서여론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도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과거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교수를 검찰이 구속 기소해 10개월여만에 항소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할 때까지 우리 사회가 겪었던 사회적 혼란과 대립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수사 지휘권 발동에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송두율 교수 수사 때 '반성 기회를 주겠다'며 9차례나 불러 조사하면서고심하다 결국 구속 수사했고, 이 과정에서 여론은 진보-보수로 갈려 극심한 갈등을빚었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은 송 교수 사건 때 수사 지휘권 발동을 검토했지만, 막판에 지휘권 발동이 몰고올 파장을 감안한 듯 '검찰 의견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검찰 수사권 독립 '논란' = 법무부 장관의 수사 지휘권은 명백히 법률에 보장된 권한이다. 그러나 구체적 사건에 대해 헌정 사상 단 한 번도 적용된 적이 없어 이번 사건을 계기로 향후 검찰 수사와 관련해 장관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았다는 점에서 논란이 빚어질 소지가 다분하다.

법률적으로는 법무부 장관이 검찰권에 대한 최종 권한을 갖고 있지만, 그동안수사와 관련해서는 전적으로 검찰총장이 책임을 졌기 때문에 수사권 약화 논란을 불러올 수도 있다.

총장이 장관의 수사 지휘를 거부하게 되면 사실상 '퇴진' 의사를 밝히는 셈이되기 때문에 검찰 내부의 혼란도 예상된다.

더욱이 이번 사건은 수사팀에서 구속 의견을 낸 것에 대해 법무부 장관이 즉각불구속 지휘를 내린 것이어서 수사팀의 수사 의지를 꺾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경찰과 검찰의 판단을 존중해 구속 여부는 일단 법원에 맡기는 게 법치주의에도부합하는 데 장관이 먼저 불구속 지휘를 내린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있다.

일각에서는 장관이 수사지휘권을 발동한 것과 관련, 지휘 수용 여부를 떠나 수사권과 관련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되는 것 아니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일반 형사 사건에서 장관이 수사지휘권을 발동할 가능성은 낮지만, '정치적 판단'이 개입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 앞으로 장관이 적극 개입하면 일선 검찰의 반발도 예상된다.

이와 관련 천 장관은 안기부 X파일 수사와 관련해서 '수사 지휘권을 발동해서라도 검찰이 충실히 수사하도록 하겠다'며 여러 차례 수사 지휘권을 언급하는 등 개입의지를 밝힌 바 있다.

◇공안사건 수사 일대 전환점 맞나 = 이번 지휘권 발동으로 검찰의 공안 사건수사도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이번 천 장관의 결정이 최근 정치권과 시민단체가 안기부, 국정원, 경찰, 검찰의 공안 사건 처리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도 이런해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와 관련, 천 장관이 '공안 사건도 예외가 돼서는 안된다'고 말한 것은 과거검찰의 공안 사건 처리 방식이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읽힌다.

천 장관은 또 '검찰은 국민의 신체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인권을 옹호해야할 중대한 책무를 지고 있다'고 강조, 중요 사건은 구속을 원칙으로 하던 공안 수사방식의 변경도 불가피할 것으로 관측된다.

매년 출범식 때마다 이적성 논란을 빚고 있는 한총련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는대부분 구속 상태에서 이뤄져 피고인들은 물론 시민단체의 반발을 불러왔다. 아울러 천 장관이 국가보안법 개폐를 줄곧 주장해왔던 점을 고려하면 이번 사건으로 국보법 존폐 논란도 재점화될 전망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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