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살려주세요" 기도하는 母情
까까머리 중학생 때 한국을 떠난 뒤 20여년 만에 다시 찾은 고국에서 나는 다시 까까머리가 됐다. 항암치료 덕분에 머리는 빠지고 몸무게도 10㎏ 이상 줄었다. 힘겹게 병과 싸우는 것도 힘들지만 몸보다 더 불편한 것은 마음이다. 아들을 살려보겠다고 애쓰는 어머니가 안쓰럽다. 주름진 어머니의 얼굴에 수심이 서린 것을 보면 내 가슴도 찢어진다.
우리 가족은 지난 1986년 남아메리카의 파라과이로 이민을 떠났다. 연이어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68)는 어머니와 우리 3형제를 이끌고 외국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보겠다고 했다. 형은 고교 시절 스페인어를 배웠고 막내는 초등학교를 다닐 때여서 새로운 생활에 빨리 적응했지만 내겐 학교생활 자체가 힘에 부쳤다. 마음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형과 동생은 대학을 다녔지만 난 고교 졸업 후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식료품점에서 함께 일을 하며 생활비와 형제들의 학비를 마련했다. 부모님은 미안해하셨지만 난 상관없었다.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데 고마워했을 뿐.
내 병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지난 5월 식사를 한 뒤 소화가 제대로 안돼 병원을 찾았다가 담당의사의 권유로 조직검사를 받았다. 검사결과는 췌장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담당의사는 "당신의 나라가 우리보다는 선진국이니 고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고민에 빠졌다. 경제적 수준과 환율 차이로 이 곳에서 번 돈은 한국에서 10분의 1의 가치에 불과해 치료비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남의 신세를 지기 싫어하시는 어머니는 결국 우리 가족이 다니는 한인성당의 신부님을 찾았다. 한국에서는 혹시나 값싸게 치료받을 수 있는 곳이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염치불구하시고 날 살리기 위해 신부님께 매달렸다. 덕분에 소개받은 곳이 대구에 있는 파티마병원이었다.
지난 6월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에 있을 때도 와 본 적이 없는 낯선 곳이었다. 돈을 얼마 마련하지 못한 탓에 보증금을 내고 방을 잡는 것은 어림없는 처지였다. 결국 어머니와 난 허름한 여인숙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파라과이로 일가족이 떠난 지 오래돼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라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도 없고 기초생활수급대상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다행히 낯선 대구에서도 도움을 주는 분들이 계셨다. 어떻게 우리 사정을 알았는지 어머니가 다니시는 큰고개 성당 신자분들이 쌀, 김치 등 먹을 거리를 챙겨주신다. 덕분에 지난 8일에는 단칸방도 얻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겨우 몸을 눕힐 수 있는 공간이지만 우리 모자에겐 아늑한 보금자리다.
파라과이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다. 형은 매을 안부전화를 걸어온다. 항상 하는 말은 '몸은 좀 어떠냐', '지내기는 괜찮으냐' 정도지만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는 안다. 빨리 건강해진 몸으로 돌아오라는 말이겠지. 다시 아버지와 함께 땀 흘려 일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조재순(67·여)씨는 병상에 누워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아들 이병곤(35)씨 곁에서 성서를 읽어준다. 조씨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들을 보살피고 기도를 하는 것뿐이다.
"이미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아 손을 내밀기가 부끄럽습니다. 성당에 함께 다니는 분들 덕분에 이젠 견딜만해요. 병원에서도 잘 해주세요. 암센터의 수녀님은 병원비가 얼마나 나왔는지 말을 안 해주십니다. 치료받는 데만 신경을 쓰라고 하시니 죄송해서 고개를 들 수 없네요."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