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 발표 시간이 다 되었는데 준비가 미흡하다. 정리 안 된 초벌 원고를 갖고 부족한 대로 발표할 수밖에 없다. 사회 보는 사람이 벌써 발표자 소개를 하는데 찾아봐도 그 초벌 원고가 없다. 나가서 작성했던 것 생각나는 대로 발표하면 되겠지 하고 연단에 섰는데 내용이 떠오르지를 않는다. 원고를 찾아오겠다고 말하고 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뒤져봐도 없다. 차 속에 뒀나 하고 주차장까지 가서 찾다가 못 찾고 돌아오며 자괴심에 시달린다. 할 말이 없다. 신뢰를 잃었다. 누가 고의적으로 원고를 가져갔다고 둘러대 볼까 하는 맘도 든다. 돌아와 보니 다른 사람들 발표까지 다 끝나고, 선생님이 기다리시다가 책망하신다. 원고라도 찾아서 청중들에게 돌리라고 하신다. 깨어보니 꿈이다. 원고 마감이 4시간밖에 안 남았다. 시간이 꿈에서처럼 지나가버린 건 아니어서 다행이다. 꿈은 이렇게 정확하게 자신의 마음속이 어떤지 알려준다. 정신치료자들은 그래서 꿈을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라고 한다.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란 책에서 '생생한 삶의 충동이 없는 삶은 타버린 재와 같고, 지혜가 없는 충동은 맹목적이며, 노동으로 채워지지 않은 지혜는 공허하다. 그리고 노동을 통해 사랑을 성취하는 데에 이르는 거'라고 했다.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모습들인 문화는 생명력과 품격이 있어야 된다. 문화는 건강한 삶의 충동으로부터 활기를 부여받는다. 의미와 보람은 감정으로부터 나오며, 감정은 본능으로부터 나온다. 그 본능이 맹목적으로 분출되기만 하면 야만이다. 유럽의 르네상스는 인간의 본능을 해방시킨 성격이 강하다. 본능의 측면에서는 자유로워졌으나 본능의 지배하에 놓인 인간이 자유인은 아니다. 성욕과 공격성들이 밀고 올라왔고, 산업과 과학의 힘을 더하여 자본주의, 침략, 제국주의 등이 되었다. 거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공산주의는 노동을 강조하긴 하였으나 지혜가 부족하였다. 본성적 충동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사랑으로 연결 짓지도 못했다. 영웅 칭호 같은 가식적 감동 밑에 욕심을 갖고 마지못해 하는 군복무를 하듯이 열심을 연기하며 살았고, 적개심이 동력으로 조장되고 자극되었다. 결과는 내부적인 파괴와 침체를 총구로 권력을 유지하며 버티는 것이고 외부적으로 주변에 대한 위협과 고통이었다.
한류가 세계를 향해 넘쳐가고 있다. 집단체조처럼 누가 통제해서 만들어내거나 조작해서가 아니라 대중문화로부터 자연스레 퍼져가고 있다. 세계인들의 가슴을 울리는 그 바탕에 있는 것이 사랑이다.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을 오천 년 동안 잊지 않은 나라, 자비와 인(仁)의 전통 속에 살아온 사람들의 인간다운 아름다움을 지금 세계인들이 발견하고 감동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까지는 은자의 나라로 숨겨져 있었고 세계는 동양에서 중국밖에 못 보았다. 일제 강점기 전후에는 세계는 일본밖에 못 보았다. 6'25의 피폐한 모습으로 알려지다가 경제 성장의 시기를 거쳐 이제는 세계인들이 근대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을 발견하고 있다. 그 바탕에 있는 것이 본능, 지혜, 노동, 사랑이 통합된 진정한 자유인에 이르는 동양적 휴머니즘, 도(道)이다. 자기 수용, 자기 이해, 자기 극복에 이르는 길, 꿈의 분석과 정신치료는 거기에 이르는 도입부에 해당한다.
주한 미대사를 지냈던 하버드 대학의 라이샤워 교수는 동북아시아의 문화와 서구 과학문명의 만남으로 세계사상 새로운 문명이 탄생한다고 하였다. 한류가 단순한 대중문화의 유행이 아니라 세계인의 심성에 인간다운 빛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같은 심성을 바탕에 깔고 있을 북한은 일부 전도된 사람들의 망상적 찬탄에도 불구하고 왜 세상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인권 유린의 사회가 되었는가? 사람의 마음은 오직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미세하다. 사람 마음의 본성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수도의 노력을 하는 사회인가, 적개심과 선동으로 기만하는 사회인가에 따라 그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지는 것인가? 북한 정권과 북한에 사는 사람들은 구분해서 판단해야 할 일이겠다.
최태진(최태진신경정신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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