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논단-공교육, 갈아엎자

입력 2005-10-04 11:51:06

1.

공교육 12년간 내게 미술은, 암기과목이었다. 그림과 제목과 작가를 외워 시험치는. 91년 배낭여행 중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찾았던 것도, 그곳이 세계 몇 대 미술관이라서는 결코 아니었다. 세계적 미술관이라서 나보고 어쩌라고. 그건 순전히 '게르니카' 때문이었다. 헤밍웨이. 프랑코. 히틀러. 폭격. 게르니카는 그저 유명한 그림이 아니라 광기의 20세기를 증언하는 압도적 모뉴먼트였고, 그를 통해 난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학창시절, '거… 아줌마 눈썹은 왜 밀었어…' 하는 생각만 드는 목살 두터운 이태리 아줌마의 어정쩡한 미소를 무려 '모나리자의 신비'로 인지하길 요구하는 미술 국정교과서는 당시 내겐 코미디였다. 신비는, 무슨, 뽕. 그러나. 어린 마음 한구석엔 혹여 내 감성 자체에 중대한 하자가 있어 그런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사실은 완전히 떨치기 힘들었다. 확인해야 했다. 20세기 최고의 걸작 중 하나라는 그 정도의 '물건'이라면, 그 물건에 피드백하는 내 감성을 살펴 결함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암 판정 받는 심정으로 게르니카 앞에 섰다. 프랑코의 요청에 히틀러가 퍼부은 폭격으로 불바다가 된 마을을 기리며 한 달 만에 완성했다는 그 대작을 3분간 올려다본 나의 첫 정서 반응, 아… 그림이… 크다… 비탄, 격동, 긴장. 없었다. 곁눈질로도 보고, 기대서도 보고,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서도 봤건만 그 어떤 예술적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주변을 30분은 서성거렸다. 그러다 아예 그 앞에 주저앉아 한참을 더 올려다봤다. 내 마지막 반응은, '모가지가 아프다…' 였다.

2.

이태리를 처음 배낭여행 할 때다. 쇼윈도에 진열된 핸드백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게르니카로부터도 아무 감흥을 받지 못한 내가 여자 핸드백 패턴 하나에 그렇게 매료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훗날 '이지적'이라고 표현하게 되기 전까진 그 느낌을 뭐라 해야 할지도 몰랐던 그 핸드백은, '펜디' 였다. 그 후 그 양복 허리 참 야들야들하네 했더니 '아르마니'였으며, 뜨개질 참 요사스럽네 했더니 '미소니'였다. 그렇게 난 '페라가모'와 '프라다'와 '베르사체'를 만났다. 여행경비 마련을 위해 가이드를 하면서 새로운 브랜드를 발견하는 즐거움은 계속됐으며 그것들이 세계적인 명품인 줄 안 것은 그 후 몇 년이나 흐른 뒤였다.

그러던 어느 여름의 피렌체. 가이드 하던 학생들을 이끌고 가죽시장을 누비다 광장의 다비드상 앞에 주저앉았다. 광화문의 이순신동상만큼이나 지나쳤던 그 상을 멍하니 올려보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돌팔매를 위한 가죽주머니를 움켜쥔 다비드의 왼 팔꿈치에서 페라가모 구두 뒤축에서 느꼈던 긴장감이, 돌맹이를 움켜쥔 오른팔의 늘어진 곡선에서 아르마니 양복의 허리라인이 느닷없이, 뜬금없이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터무니없게도 말이다.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3.

다비드상이 명작인 이유는, 명품이 명품인 이유와 같다. 명품이 명품인 이유는 사람들이 그 상품이 가진 고유의 라인과 색상과 패턴에 정서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신기하다. 그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강제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다비드상도 마찬가지다. 그 선과 비례와 표정이 시대를 뛰어넘어 사람들의 일정 정서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전의 난 그걸 알아볼 눈이 없었던 것이고.

내 미감은, 학교의 미술시간이 아니라 상점의 명품을 통해, 그렇게 일깨워졌다. 그 일 후 내겐 의문 하나가 생긴다. 나의 정서적 반응장치는 왜 그렇게 둔하게 세팅되어 있었던 걸까. 타고나길 그렇게 아둔하게 타고난 것인가….

4.

대한민국의 공교육, 여기저기 조금씩 고쳐서 될 일이 아니다. 그 근본정신부터 갈아엎어야 한다. 학교는 대학입시를 위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온전한 제 구실을 하게 만들라고 있는 거다. 온전한 제 구실은커녕 아름다운 걸 아름답다 볼 줄조차 모르는 바보 양성은 이제 제발 그만.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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