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관의 인물탐방] 김진만 대성그룹 상임고문

입력 2005-09-30 16:14:06

"아시아 주도 은행 우리가 만들어야"

2000년의 한빛은행 관악지점 불법대출 사건은 정치 이슈화 되면서 일파만파의 파장을 낳았다. 대출 당시 청와대 박지원 공보수석이 압력성 청탁을 했느냐 아니냐가 의혹의 핵이었다. 당시 한빛은행장은 이 사건을 "지점장과 업체 대표가 꾸민 사기극"이라며 정치권의 공방을 일축했었다.

그가 김진만(金振晩·65) 대성그룹 상임고문이다. 정치적 이슈로 몰고가던 한나라당으로부터 질타성 전화를 받기도 했다. "총재와 맞서겠다는 것이냐"고 몰아세웠다. 결국 이 사건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옷을 벗었다.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친 한빛은행의 출범은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갈등을 줄이는 한편 국내외 경제환경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아 그가 초대행장으로 뽑혔다.

24시간 행장으로 일했다. 그러나 '일개 지점의 단순 사기극' 때문에 2년여 만에 옷을 벗었다. 상업은행 대구지점에서 시작한 금융인 생활 35년3개월을 그렇게 접었다.

60-70년대 개발시대 은행인은 비즈니스 맨이 아니었다. 앞가림을 잘하는 게 능력이었다. 공익성을 강조한 반면 서비스와 수익 증대는 뒷전이었다. 인사는 물론 대출에서도 '빽'이 만연했다.

회의감이 들었다. 한국종금 창립멤버로 자리를 옮겼다. 국내외 합작으로 설립된 한국종금은 그에게 금융산업의 논리를 알게 했다. 시장 수요의 흐름에 맞춘 새로운 서비스를 창출해야만 반대급부로 수익성을 올릴 수 있음을 느끼게 했다.

한미은행 설립 당시 자금부장으로 1금융권에 복귀했다. 14년 만에 한미은행장을 맡았다. 영어실력이 뛰어난데다 1·2금융권을 두루 잘 알고 있는 그의 미국식 상업금융 마인드를 외국 주주들은 일찌감치 인정하고 있었다. 그가 행장을 맡자 주변의 평가는 '준비된 행장'이었다.

곧바로 외환위기가 닥쳤다. 모두가 안될 것으로 여기던 자본 증자를 두 배로 늘리고 사옥도 마련했다.한빛은행장에 선임되자 주변에서는 걱정을 해왔다. 초대행장 자리는 쉽지 않다는 우려였다. 정치적 여건도 유동적이고 무엇보다 그가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때문이었다. 소신대로 일하고 당당히 의견을 내는 것은 미묘한 시절에는 해독이 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깔끔하기보단 수더분한 모습은 상대를 편하게 한다. 한빛은행장 시절 난생 처음으로 홀인원을 했다. 주변에서 행운이라고 했다. 개인돈을 털어 공중전화카드 1천 장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행운을 같이 나누자'는 글귀를 새겼다. 지금도 기념으로 간직한 후배들이 많다고 한다.

특강 기회가 있으면 "아시아의 주도 은행을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계적 은행과는 경쟁이 어렵지만 중국이나 일본보다 우리 은행이 경쟁력이 높다고 한다. 뱅킹서비스의 수출은 어느 산업 못잖은 부가가치를 가져온다고 믿는다.

군위 출신으로 경북사대부중·고를 나왔다. 구순을 바라보는 노모는 아직 고향에 계신다. 대구 갈일이 있으면 잠은 어머니곁에서 잔다. 대구 경제를 살리려면 새로운 산업을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서점을 자주 찾는다. 영화 팬이기도 하다. 아직 장가 안 간 맏아들이 영화 프로듀스로 활약한다. 그 아들에게 일찌감치 우리 영화산업의 전망과 한류열풍을 예고하기도 했다.

논설위원

사진·김영욱기자 mirage@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