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이런저런 일들로 속 끓일 때가 있다. 일 년에 한두 번이면 얼마나 좋으랴만 시시로, 때때로, 가끔, 종종 속이 탄다. 저마다 "내 이 속을 누가 알랴"고 푸념도 한다. 기업체를 운영하는 한 여성 사업가, 어느 날 쓰러져 있는 소나무 둥치의 속이 시커멓게 썩은 것을 보고 문득 애처로움을 느껴 부지불식간에 이렇게 말했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니도 사업했더나?"
초가을의 햇살이 유난히 따글따글하다. 가을인데도 여름처럼 뜨겁과 화창한 날씨. 농부들은 이맘땐 이렇게 바짝 뜨거워야만 한다고, 그래야 과실도 달고 벼도 잘 익는 법이라며 보약 날씨라고 반긴다. 아마도 릴케가 그토록 간절히 기도한 "남국의 햇살"이 이런 것일 테고, 미국인들이 말하는 "인디언 썸머"와도 닮은 날씨일 것이다.
햇살 따가운 이런 가을날, 과피가 쩍쩍 갈라진 석류를 보면 왠지 안쓰럽고 짠해진다. 저것이 얼마나 아팠을까 싶기도 하고, 마치 속이 썩은 소나무를 본 그 여성 사업가가 느꼈음직한 그런 연민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감나무나 모과나무와도 달리 석류나무는 어딘가 귀티나는 새악씨 같기도 하고, 목청 낭랑한 선비같기도 한 나무다. 꽃잎과 열매의 붉은 색깔이 재액을 막아준다 하여 가정에선 흔히 장독대 옆이나 담장 근처에 석류나무를 심었다. 박사(薄紗)처럼 얇고 순전한 선홍빛깔의 석류꽃들이 초여름 비에 파르르 떠는 모습은 애잔한 아름다움 그 자체다. 여름의 거친 장대비에 두드려 맞고 가을 태풍에 할퀴어지면서 복주머니처럼 탐스럽던 석류의 볼엔 가로세로 금이 가고 거무레한 상처 자국들이 남게 된다. 그러면서도 석류는 안으로 고이고이 보석들을 키워낸다. 마침내 뜨거운 가을빛에 석류는 온몸이 바알갛게 굽혀지고, 속의 알갱이들은 소리를 내지르고….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석류는 마침내 스스로 제 몸을 찢는다. 튀밥처럼 튀어나오는 촘촘한 알갱이들. 루비마냥 붉고 수정처럼 맑은….
정지용이 그의 시 '석류'에서 "홍보석 같은 알을 한 알 두 알 맛보노니/ 투명한 옛생각 새론 시름의 무지개여~"라고 노래했던 그대로의 보석들이다. 무릇 '아름다운 완성'에는 인고(忍苦)의 세월이 있음을 석류를 보면서 또 한 번 깨닫게 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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