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하나만 낳았으면…"자궁암 앓는 조선족 출신 이수옥씨

입력 2005-09-14 09:09:16

병원에 들어섰을 때, 부부는 이마를 맞대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마치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도 밖에 없는 것처럼 간절하게 읖조렸다. 남편의 볼에 눈물자국이 보이자 부인이 남편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다. 괜찮다."

환자인 아내보다 간병하는 남편이 더 작고 마르고 헬쓱해 보였다. 그것은 아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땀을 닦아주고 이곳저곳을 주물러 준다고 눈을 붙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궁암 3기로 두 달 전 입원한 이수옥(47·여)씨는 중국 요령성 심양시 출신이다. 4년 전 집 담보금 6만 원(1천만 원 상당)을 잡히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씨는 식당보조, 파출부, 요구르트 배달까지 닥치는대로 몸을 굴렸고 수입은 적었지만 이대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씨의 외숙모가 중매를 섰다. 중국요리점을 하고 있는 동갑내기 노총각을 한번 만나보면 어떻겠냐고. 이씨는 중국에 두고 온 아이가 있었다. 한번 이혼한 몸인데 누가 날 받아주겠냐고 이씨는 애써 외면했다. 하지만 이씨보다 키도, 얼굴도 작고 말랐던 그 중국집 노총각은 이씨를 곱게 안아줬다.

남편 김재덕(47·달서구 죽전동)씨는 고아다. 2살 때부터 영천의 한 고아원에서 같은 처지의 아이들과 자랐다. 17살이 됐을 때 중국집 배달원으로 들어가 틈틈이 일을 배웠다. 면을 뽑고, 소스를 볶고, 짬봉국물을 만들며 열심히 벌어서 그럴듯한 중국요리점을 차리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았다. 일 밖에 모르는 노총각이라고 주위에서 빈정대도 곧이 듣지 않았다.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 마흔이 넘었을 때는 보증금 1천만 원에 월세 40만 원인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헐값에 넘겨준 몇 평 안되는 중국요리점을 하나 가질 수 있었다.

"폐업신고를 했습니다. 선불로 일하던 아이들이 가불도 해가고 돈을 가지고 달아나기도 해서 운영이 많이 어려웠는데 아내가 쓰러졌지요. 그 때 몸에 열이 많다고 좀 쉬라고 했는데 말도 참 어지간히 듣지 않더니만."

이씨가 두 달 전 49cc 오토바이로 배달을 하다 현기증에 쓰러졌다. 일주일 전부터 열이 많았고 얼굴이 빨갛고 팔, 다리에 힘이 없었다. 먹은 것이 올라오고 더부룩했다. 이씨는 혹시 임신이 아닐까 오히려 기뻐했다.

하지만 증세는 아이가 아니라 암세포였다. 나이가 많지만 고아로 외롭게 컸던 남편을 위해 딸 하나는 꼭 낳고 싶었다던 이씨는 괴롭다. 남편도 당신같은 딸아이 하나만 낳아 욕심부리지 말고 잘 살자고 항시 얘기해왔던 터였다. 하지만 암세포가 자궁에 생겨 앞일을 알 수 없게 됐다. 벌써 병원비만 몇 천만 원. 자궁쪽이 위험해 수술을 할 수 없는 이씨는 앞으로 수 차례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반복해야 한다. 남편은 그동안 모아뒀던 돈을 두달만에 다 써버렸고 지금부터는 은행대출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됐다.

"우리는 욕심없이 열심히 살았습니다. 부지런히 몸을 굴려 중국으로 인사도 가고 반듯한 가정도 꾸리고 싶었는데. 수옥씨 딸아이도 얼른 데려와서 공부시켜야죠. 완쾌만 되면 얼마나 좋아···."

일주일꼴로 날아드는 진료비청구서가 이제 짐이 되기 시작했다. 아내는 미안해서 자꾸만 고개를 숙이고, 남편은 괜찮다면서도 살이 빠지고 주름이 늘어간다. 또 아파도 좋으니 4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단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그 때가 참 그립다며 부부는 다시 이마를 맞대고 '괜찮다, 괜찮다' 읖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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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현기자 ssang@imaeil.com

사진: 자궁암으로 투병 중인 이수옥씨는 남편의 지극스런 병 간호에 고마워 하며 하루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길 기도하고 있다.

이상철기자 finder@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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