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출입기자 때 만났던 박철언(朴哲彦) 전 의원(현 대구경북발전포럼 이사장)은 탁월했다. 인간적 매력을 배제한다는 전제를 깔고 만난 그의 눈에는 나라와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와 경륜이 배어 흘렀다. 정치부 기자들의 치기 서린 오만을 납작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매끈한 외모에 잘 나간 삶을 산 그에게 애당초 정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말을 나누다 보면 대구·경북이 낳은 박철언의 무게는 컸다.
아직도 그의 별칭은 6공 황태자다. 그러나 비운의 황태자다. 6공의 최대 치적인 북방외교나 3당 합당, DJP 연합에는 그의 땀과 지혜와 인내가 담겨 있다. 그러나 왕관은 오지 않았다. 대신 슬롯머신 업자에게 돈을 뜯은 부패한 정치인으로 매겨졌다.
누구에게나 변명은 있다. 권력의 언저리는 더욱 그렇다. 변명은 구차함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뒤늦게 깨달은 삶의 지혜일 수도 있다. '잘났던' 그의 변명은 "나는 실패한 이상주의자"다.
3당 합당과 DJP연합의 결과는 그가 꿈꿨던 진보와 보수의 화합이 아니었다. 밀실정치 시절 활개쳤던 그보다는 훗날 주역들이 훨씬 노회했다. 김대중과의 연합은, 낳아주고 정치적 기반이 됐던 대구에서 그를 버림받게 했다. 내각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김영삼·김대중의 양면성에 비하면 그는 순진했다.
42년생으로 63세다. 세월은 속이지 못한다. 늙었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변명이 진솔하게 다가온다. 차가운 사람으로 알려졌다. 잘 나갈 때 그의 이미지는 오만에 가까웠다. 유한한 권력의 속성을 모르지 않았을 영리한 그가 왜 그렇게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을까. 당시를 회고하는 그의 말을 요약하면 "맡은 직책이 친구와 막걸리를 마시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북방외교나 3당 합당 모두 전제는 비밀이었다. 베일에 가려진 일은 그마저도 베일에 가리게 했다고 한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등 전직 대통령 네 사람과 모두 진한 인연을 갖고 있다. 고마운 인연이나 나쁜 기억을 모두 털어버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얼마전 펴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이란 회고록이 나오자 사람들은 김영삼과의 악연을 되새긴다.
회고록이 나오자 비판도 많았다. 자신의 정치역정에 대한 철저한 고백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책의 성격이 역정을 돌아본 회고록이 아니라 증언록 내지는 기록이라는 말로 변명한다. 종이컵에 내온 커피로 대접했다. 속말로 추운 모양이다. 변호사지만 유료 변론은 안한 지 오래다. 손만 내밀면 자리야 있겠지만 기업체 고문 변호사도 아예 꿈꾸지 않는다.
그래도 대구경북발전포럼은 3년째 이어간다. 고향 덕에 경험한 경륜과 식견을 고향에 되돌려 주는 게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긴다. 그 핑계로 일주일에 한번은 대구에 간다. 막내 동생과 함께 대구에서 사는 90노모는 그렇게 가는 그에게 한끼는 먹여 보내려고 한다. 백발의 어머니와 중늙은이 아들이 인생의 황혼에 모정과 효를 주고받는다.
공식 추천을 받은 시인이다. 감옥에 있을 때 쓴 시를 원로 시인 몇몇이 추천해 등단했다. 그를 감옥으로 보낸 YS가 시인이란 선물을 준 셈이다. 작년 연말 '작은 등불 하나'란 시집을 냈다. 고교 시절 문학서클 활동을 하며 익힌 글쓰기가 보탬이 됐다.
논설위원 seo123@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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