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미화가 만난 사람] 의병대장 허위선생 주손 허경성씨

입력 2005-09-08 10:33:28

왕산기념관 건립에 생가 터 쾌척…"옥탑방 살아도 할아버지 뜻 살려야죠\

"옥탑방에 살면서 죽으로 끼니를 때우더라도 왕산 할아버지의 뜻은 살려야죠. 근년들어 우리가 유례없이 극심한 불경기를 겪으면서도 희망을 갖지 못하는 것은 민심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한강의 기적을 이뤘던 한민족(韓民族)이 이 위기를 딛고, 재도약하려면, 1백년전 왕산 할아버지가 보여주셨던 고결한 애국, 애족심으로 다시한번 뭉쳐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어떤 형태로 열강의 희생양이 될 지 알 수 없습니다. "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첫장인 의병전쟁에서 최고봉을 점하는 왕산 허위(1855년 4월2일~1908년 10월21일) 선생의 주손 허경성((78세)씨는 대구시 북구 산격동 실내체육관 앞 중국집 3층의 옥탑방에서 산다.

앞으로 쏟아질듯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니 한켠에 부부가 겨우 누울 수 있는 손바닥만한 공간을 얼기설기 지었다. 그렇게 코딱지만한 곳에 기거하면서 나라위해 목숨바친 허왕산 할아버지의 기념관을 짓기 위한 생가터 땅 601평(구미시 임은동 262-2)을 최근 경북 구미시에 기부 채납했다. 순국하신지 98년만에 물질적 풍요보다 정신적 가치를 더 높이 살 줄 아는 허경성 3형제의 '40년' 땀의 결실로 왕산공원을 짓기 위한 터전이 마련된 것이다.

"그곳은 13도 연합의병대장으로 순국한 허왕산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허방산(재만독립운동가), 허성산(독립운동가) , 허노주 등 네 할아버지가 태어나신 곳이죠."

왕산을 필두로 한 4형제는 물론 그 사촌들까지 3대에 걸쳐 의병활동을 하느라 허위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후손들은 러시아, 중국, 북한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허경성씨도 온 집안이 서간도로 들어가는 바람에 1927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살았으나, 다시 원주민들에게 개간지를 빼앗기고 북간도로 쫓겨갔다가, 또다시 정책에 의해 블라디보스톡, 목단강 등으로 떠밀려다니다가 지난 46년 귀국했습니다."

목단강 철도국에 근무하다가 압록강 도문을 거쳐서, 삼팔선을 넘어 서울에 와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던 허경성씨에게 6촌형(허흡, 전 대구 민선시장)이 연락을 해왔다.

"무조건 대구로 내려오라더니 일자리를 주선해주어서 대구에 정착했습니다."

허씨는 "친일 자손들은 교육도 많이 받아 고관도 되었지만, 우리는 교육을 못받고 우선 먹고 살기 바빠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겨우 밥을 먹고 살게 되면서, 왕산 할아버지의 생가터를 가보았고, 집안 일족 앞으로 돼있던 그 집을 사서, 올해 기부하게 됐지요."

허씨는 늦었지만 왕산선생을 기리는 사업이 시작되는 일이 몹시 기쁘다. 최근에는 허왕산에 대한 TV특집이 방영되면서 키르키즈스탄에 살던 사촌형 블라디슬라브가 귀국했다. 왕산 집안의 독립운동과 그 후예들이 사는 모습을 추적하던 국내 모 프리랜서가 도움을 주어 블라디슬라브가 경기도 안성의 중소기업에 취직하게 된 것이다.

"아직 중앙아시아, 모스크바, 키르키즈스탄, 사마르칸트 등지에 가족 친지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모여야죠. 블라디슬라브 형도 집안이 몽땅 간도로 이주한지 75년만에 귀국한 셈이죠."

종형 블라디슬라브는 키르키즈스탄에 묻힌 막내 할아버지의 묘에서 흙을 조금 가져와서 왕산 할아버지의 묘토와 합토를 했고, 언젠가 왕산묘의 흙을 조금 가져다가 키르키즈스탄에 뿌릴 예정이다.

"그동안 비참하게 사느라 왕산 할아버지를 기억할 시간마저 부족했습니다. 최근 들어 구미시에서 왕산추모사업을 통해 그 정신을 길이 이어나간다고 하니 그보다 더 반가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왕산은 합병을 앞두고 있는 서울을 일제의 손아귀에서 되찾기위해 1908년 5월24일 서울을 공략했으나 일본 헌병부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6월11일)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고, 같은해 10월21일 오전 순국했다.

재판과정에서 "누가 의병을 일으키게 했느냐"고 묻자 "의병을 일어나게 한 것은 이등박문이요, 대장은 바로 나다. 이등박문이 우리나라를 뒤집어놓지 않았다면 의병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던 왕산의 흠결없는 독립정신은 박상진, 안중근 등에게로 이어졌다.

왕산의 시신을 수습한 박상진은 판사자리를 던져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안중근은 이등박문을 포살하고 재판과정에서 "허위와 같은 충성심과 용맹한 기상을 우리 동포 이천만이 지녔다면 오늘의 국욕(國辱)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는 말을 남겼다.

"왕산 할아버지는 당시 많이 들끓던 나병환자들이 구걸을 다니면 상을 차려서 같이 먹을 정도로 성품이 관후하셨다"는 허씨는 "나라를 잃어갈 때 처절한 저항과 항쟁을 펼쳤던 선각자들을 후손들이 기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앞날을 누가 보장하겠느냐"고 되묻는다.

한편 구미시와 안동대박물관은 '왕산 허위의 나라사랑과 의병전쟁'을 낸데 이어 2007년까지 35억원을 들여 왕산기념관 및 부대시설을 지을 예정으로 실시설계에 들어갔다. 지난 7월 발족된 왕산기념사업회(회장 노진환)가 큰 힘을 보태고 있다.

글 최미화 편집위원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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