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숙인 평범한 가장의 비애

입력 2005-09-06 15:33:24

중앙도서관 목요시민 책마당 '대한민국 아버지' 위기 해법

가을답지 않은 무더위로 저녁까지 푹푹 찌는 날씨가 계속됐던 지난 1일, 대구 중앙도서관에서 열린 '목요시민책마당'에서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아버지들의 모습과 '아버지의 위기' 해법을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졌다.

토론의 소재가 된 책 '대한민국 아버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들의 이야기다. 신문이나 뉴스에서 흔히 들었던 기러기 아빠, 고개 숙인 가장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가슴 깊숙이 묻어두고 윽박질러댈 뿐인 평범한 아버지의 이야기 등을 17개의 장으로 나눠 싣고 있다. 소설의 형식을 취했지만 소재는 모두 실화에 바탕을 뒀다.

이 책을 쓴 작가 이중원씨는 "대한민국에서 아버지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체험하고 있는 입장에서 자신과 같은 평범한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가정과 사회의 시선이 좀 더 따뜻해졌으면 하는 소망에서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아버지의 위기

IMF 사태 이후 고개 숙인 한국의 중년들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사회에서는 경쟁에 따라가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집에 돌아오면 경제적 풍족함을 제공하지 못하는 죄스러움에 고개 숙여야 하는 가장의 비애가 짙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 간혹 자녀의 잘못에 목청이라도 높일라 치면 아내가 먼저 "당신 말은 안 먹혀요"라고 막아선다. 급기야 명예퇴직으로 받은 얼마간의 돈마저도 노후를 설계하기보다는 조기 유학을 가겠다는 자녀의 생떼에 그대로 털려 빈손이 되고 만다.

이런 이 시대의 아버지 모습에 대해 발제를 맡은 순중권 경북대 통계학과 교수는 "이 책은 결국 아버지의 치부를 샅샅이 드러낸 책"이라고 지적했다. 과거에는 가장의 권위에 묻혀 지나칠 수 있었던 남자의 치명적인 약점과 남성만이 가지는 결점들이 경제나 시대 상황이 변화하면서 모조리 드러난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설명이다.

순 교수는 "아버지 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데 아내와 자식들에게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끊임없이 말하게 하고 아버지의 의무, 바람직한 가정을 세우기 위한 아버지의 역할도 배웠지만 아버지의 변명을 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더라"며 "전 생을 바쳐 가족을 위해 '돈 벌어오는 기계'로 봉사해 봤자 그저 항상 죄인 취급을 받는 아버지의 비애"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 책을 통해 남성의 약점을 알게 함으로써 오히려 아내나 자녀들이 아버지를 이해하는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책이라고 본다"며 "나이는 들어도 절대 철들지 않는 남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너무 다른 남과 여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생물학적으로 다른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감정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기보다 속으로 담고 있는데 익숙하고, 어린 아이들의 '오줌 멀리 누기 경쟁'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남성들의 쓸데없는 자존심에 대한 이해가 기초돼야 한다는 것.

순 교수는 "생물학적으로 가장 멸종에 가까운 인종이 남성"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근거로 최근 영국의 학자가 발표한 연구 결과를 들었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 상처를 쉽게 받으며 더 깊고 오래 남는다는 것. 또 그는 "남성은 얄팍한 자존심과 체면을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한 나머지 현실적응력이 여성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며, 나이가 들수록 남성 호르몬이 증가해 더욱 활동이 왕성해지는 여성에 비해 남자들은 여성 호르몬이 증가해 오히려 더욱 약한 남성이 되고 만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여성 토론자들의 반론도 이어졌다. 감성이 중요시되는 현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감정에 무디고 표현하지 않는 남성에게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박영숙씨는 "경상도 남자들은 상대방의 뒤통수를 보고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간파할 수 있는 여자를 요구해 왔을 뿐 자신들이 바뀔 생각은 하지 않았다"며 "그 덕분에 지금 세상은 여성이 더 많은 주장을 펼치고, 더 많은 사회 활동을 하며 세상을 주도하고 있는 시대"라고 꼬집었다.

▲가정 속에서의 공존

결국 토론자들이 '대한민국 아버지'에서 읽어낸 것은 무너진 아버지의 신세를 한탄하며 권위적인 가부장제의 회복을 바라는 남성들의 모습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 사랑받고 싶고 조금의 이해와 배려를 바라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또 이런 문제를 야기시킨 것은 아버지 자신도 되겠지만 바로 우리 사회라는 뼈아픈 반성이었다.

오정화(여)씨는 "이 책은 현재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갖가지 상처를 모두 건드리고 있다"며 "인본주의보다 물질주의로 흘러가버린 사회상, 모든 일을 흑백논리로 나눠 가족마저도 편을 가르는 세태, 표현하는 사랑만을 '사랑'으로 이해하는 말초적인 아이들을 키워내고 있는 이 시대 가정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나타냈다"고 평가했다.

'아버지의 위기'에 대한 토론자들의 해법은 바로 '가족 안에서의 공존법'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공존'에 대한 인식을 통해 아버지의 아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너져가는 가정을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순 교수는 "아내와 자녀들은 이 책을 통해 아버지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이해를 높일 수 있으며, 아버지들은 책을 읽고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자신과 가족의 삶을 능동적으로 개척해나가는 모습으로 바뀔 수 있는 자극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윤조기자 cgdre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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