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회담> '구보타 망언'의 전말

입력 2005-08-26 09:19:07

정부가 공개한 한일회담 외교문서에는 1953년제3차 회담 때 일본측 수석대표인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망언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이른 바 '구보타 발언'으로 불리는 망언은 한국의 재산청구권 요구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일본 정부의 본심을 대변하는 궤변에 불과했지만 회담을 4년간 자초시킨 암초가 됐다.

구보타는 1953년 10월15일 3차 회담의 재산청구권위원회 2차회의 석상에서 한국측 홍진기(洪璡基) 대표와 심한 언쟁을 했으며 이 것이 곧 '구보타 발언'이다.

문서에 따르면 홍 대표는 "일본의 재산은 미 군정의 손으로 법령 33호에 의해접수됐다..본래대로 하자면 한국은 36년간의 일본지배하에서 한국민족이 받은 피해- 예를들면 애국자의 투옥 학살, 한국인의 기본적 인권 박탈, 식량의 강제 공출, 노동력의 착취 등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나 한국측은 그것을 요구하지 않고 순수한 법률적 청구권만을 제출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여 우리는 일본측이 한국에 대한 청구권(역청구권) 주장을 철회할 것을 희망한다"고 촉구했다.

그러자 구보타는 "그렇다면 일본측도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36년간 벌거숭이산을 푸르게 바꾸었다던가, 철도를 건설한 것, 수전(水田)이상당히 늘어난 것 등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다"라고 망발을 해댄 것이다.

이에 '한국인은 일본에 점령당하지 않았더라면 스스로 근대국가를 만들었을 것' 이라고 홍 대표가 맞서자 구보타는 "일본이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중국이나러시아에게 점령되어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라고 자극하고 나섰다.

한국 대표단은 구보타 발언이 회담의 기본정신을 망각한 망언으로 규정, 다른분과위원회 출석을 거부한데 이어 김용식(金溶植) 수석대표가 10월 20∼21일 제3,4 차 본회의에서 그의 발언을 5개항으로 정리해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구보타는 자신의 발언을 철회할 의사 없다고 밝혀 3차 회담은 결렬되고말았다. 일본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 때인 1957년 12월 구보타 발언과 역 청구권 주장을 철회했다. 이는 새로운 대미외교와 대아시아 외교관계 수립을 의도했던 기시 정권의 양보에 따른 것이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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