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듣는 책 '희망의 빛'…효목도서관 시각장애인실

입력 2005-08-23 10:15:25

빛이 없는 세상은 마냥 어둠뿐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어둠을 소리로 밝혀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대구효목도서관 시각장애인실의 자원봉사자들. 이들이 녹음하는 한 개의 테이프는 책을 읽지 못하는 많은 시각장애인들의 눈이 되어 준다. 이렇게 책 속의 세상을 접한 시각장애인들은 녹음된 책들 중 한 권을 골라 한 달에 한 번씩 독서토론회를 열기도 하고, 일 년에 한두 차례 문학 기행을 떠나기도 한다. 소리로 세상을 열어주는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이들이 읽어주는 책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책 읽어주는 사람들

책은 눈으로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소리로 읽을 수도 있는 법. 지난 18일 오전 11시 대구시 만촌동 효목도서관 내 시각장애인실에는 2명의 자원봉사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헤드폰을 쓰고 마이크 앞에 앉아 방송통신대 교재 중 하나인 '헌법'을 낭독하고 있던 김숙영(30·여·북구 복현동)씨. 그는 '3년차 책 소리 배달부'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오디오 북을 녹음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것.

녹음실 밖에서는 또 한 명의 자원봉사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아직 1년도 안 된 새내기'라고 자신을 소개한 신명희(45·여·동구 신천동)씨는 "아직 녹음하는 것이 서툴다 보니 녹음 진도도 늦은데다 소리가 매끄럽지 못해 오히려 듣는 이들의 귀를 거슬리게 하지 않을지 늘 걱정"이라며 "소설의 대사를 좀 더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 다음 달부터는 동화구연을 배울 예정"이라고 했다.

이들처럼 효목도서관에서 오디오 북 녹음을 하는 자원봉사자는 모두 27명. 일주일에 한 번씩 시간을 내 테이프를 녹음한다. 이들이 낭독하는 책의 종류는 다양하다. 동의보감 같은 의학서적에서부터 종교서적, 수험 교재 등 시각장애인들이 요청하는 모든 책을 오디오 북으로 만들어 준다.

이렇게 제작된 오디오 북은 시각장애인들에게 우편으로 보내 주거나 안방까지 직접 배달해주기도 한다. 김씨는 "가끔 방문대출 봉사를 나가기도 하는데 테이프를 가져다 주면 굉장히 반가워해서 기분이 너무 좋다"며 "바깥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사람과의 만남이 그리워 우편보다는 방문대출을 선호하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맞춤형 오디오 북 제작

효목도서관에서는 1991년부터 시각장애인실을 운영해 왔다. 지금 이곳을 이용하고 있는 회원만 450여 명. 도서관 특색 사업으로 시각장애인실을 운영하기 시작해 현재는 3천700권의 점자도서와 1만9천여 권의 오디오 북, 36개의 화면해설 비디오 등을 구비하고 있다.

가장 많이 이용하는 것은 오디오 북. 성인이 된 뒤 사고 또는 질병으로 뒤늦게 시각장애를 입게 되면 점자를 배우지 못했거나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점자도서보다는 오디오 북이 인기가 높다. 신종원 관장은 "오디오 북은 점자도서보다 제작이 편리해 시각장애인들의 요구에 따라 '개인 맞춤형'으로 제공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공부에 필요한 책이나 생계를 위해 필요한 책들을 부탁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오디오 북 하나를 녹음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현재 김숙영씨가 녹음 중인 '헌법'은 60분짜리 카세트 테이프 9개와 90분짜리 4개를 사용했지만 아직도 3분의 1가량이 남았다. 일주일에 2, 3시간씩 녹음을 하다 보니 책 한 권을 녹음하려면 보통 한 달, 두꺼운 책은 더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김 씨는 "가끔 급하다고 부탁을 하는 분들이 있으면 하루 8시간을 꼬박 녹음하는데만 매달리기도 한다"며 "27명의 자원봉사자가 있지만 직업을 가지고 짬짬이 녹음 봉사를 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어서 원하는 책을 즉시 공급해 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빛소리 독서회

'빛소리 독서회'는 효목도서관 시각장애인실 이용객들이 함께 모여 책에 대해 토론하는 모임이다. 매달 첫째 주 토요일마다 10여 명의 회원이 효목도서관에 모여 오디오 북을 통해 책을 듣고 생각을 나눈다. 1994년부터 독서회원으로 활동해 온 서관수(41.대구시각장애인복지관 강사)씨는 "일 때문에 늘 바쁘지만 여가시간이 생길 때는 주로 책을 듣는다"며 "눈이 보이지 않다 보니 여가 시간을 소리로 들을 수 있는 오디오 북 이외에는 별달리 할 일이 없다"고 했다.

서 씨가 말하는 '빛소리 독서회'의 가장 큰 장점은 인연의 고리가 된다는 것. 활동에 제약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외출을 꺼리게 되는 시각장애인들이 많은데 '독서토론'이라는 계기가 있어 여러 사람을 만나 생각을 듣고, 술도 한잔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렇게 책을 통해 마음을 나누다 독서회 안에서만 3쌍의 커플이 맺어져 결혼을 하기도 했다"고 자랑했다.

지난해에는 독서 회원들이 영주 부석사 등을 돌아보는 문학기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코로 스며드는 신선한 공기와 함께 동행한 자원봉사자들의 상세한 묘사, 손으로 만져보는 질감 등을 통해 비장애인이 느끼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여행의 묘미를 맛봤다.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는 '꽃들에게 희망을'이 가장 감동 깊었다는 그는 "눈으로 읽을 수는 없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 있어서도 책은 지식을 얻고 다른 세계를 맛볼 수 있는 것은 중요한 창"이라며 "오디오 북과 소리로 읽어주는 컴퓨터(스크린 리더)에 자원봉사자들까지 있어 책읽기가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했다.

글·한윤조기자 cgdream@imaeil.com

사진·박노익기자 noi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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