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밖 사람들'/포항 최고 오지 죽장면 도등기 마을

입력 2005-08-20 09:20:48

도시가 그립냐고? 대답 대신 그저 웃을 뿐

포항의 낮 최고기온이 34.7℃였던 지난 12일 포항에서 가장 오지로 불리는 죽장면 하옥리 속칭 도등기 마을을 찾았다. 지프를 몰고 청송군 부동면 항리 속칭 '얼음골'로 달리면서 며칠 전 죽장면사무소 상옥출장소 최영목 소장이 한 말이 내내 귓전을 맴돌았다.

"지프로 갈 수는 있지만 워낙 길이 험해 초행길이라면 장담할 수 없네요. 차라리 제가 안내할 테니 하옥리 하옥청소년수련원에서 걸어갑시다."

하지만 산골에서 하룻밤을 묵을 예정인 까닭에 최 소장의 호의는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얼음골을 택한 것은 "하옥리보다는 얼음골로 올라오는 게 조금 쉽다"는 도등기마을 강상용(80) 할아버지의 귀띔 때문이었다.

얼음골에서 도등기마을로 가는 비포장도로는 안내간판이 없는 것은 물론 무성한 잡초에다 좁은 산길이라 지리에 밝지않은 사람이라면 찾기가 쉽지않았다. 게다가 얼마 전 내린 비 탓에 군데군데 움푹 패여 있는 등 예상외로 험했다.

길 왼쪽은 수십m나 되는 낭떠러지. 반대편에서 차라도 내려온다면 비켜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조심조심 핸들을 조작하느라 온몸에는 식은땀이 났다. 곡예운전 20여 분 만에 산중턱에 그리 넓지않은 평지가 보였다. 도등기마을이었다.

지붕만 붉은 양철로 덮어씌웠을 뿐 뼈대와 벽은 나무와 진흙으로 지은 전형적인 산골 집인 강 할아버지댁에는 때마침 귀한 손님이 와 있었다. 포항 기계우체국 소속 우체부인 권태규(54)씨였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이곳에 온다는 권씨는 강 할아버지 내외가 가장 반기는 손님 중 한 사람. 이날도 강 할아버지의 약과 세금 고지서를 배달한 후 잠시 쉬던 중이었다.

22년째 시골 우체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권씨는 "이 곳은 포항에서 가장 오지 중 오지입니다. 여기 올 때는 오토바이 펑크에 대비해 아예 바람 넣는 펌프를 갖고 다닌다"며 웃었다.

잠시 뒤 강 할아버지의 부인 정운조(75) 할머니가 토마토를 썰어왔다. 정 할머니는 "농약 한 번 안 친 토마토라서 겉은 못생겨도 맛은 괜찮을 거야"라며 권했다. 초등학교 때 집 앞 텃밭에서 자란 토마토를 물에 씻어 설탕에 찍어 먹던 추억이 떠올랐다. 삼복더위에 시원한 계곡물로 세수하고 툇마루에 앉아 산골짝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쐬며 토마토를 먹는 이 맛을 그 누가 알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할아버지 내외는 이 마을에서 살게 된 사연을 털어놨다.

"우리가 들어올 때만 해도 해남댁, 하국댁, 장동댁, 대송댁, 문호댁, 헌산댁과 택호는 없었지만 김점태, 강태수, 안재용, 김호필씨 등 11집이 살았지. 지금은 우리집과 혼자 사는 안창헌(60)씨밖에 없어."

울진군 온정면이 고향인 강 할아버지는 지난 67년쯤부터 이 곳에 산다. 당시 하옥초교 교사였던 강 할아버지는 약초 재배를 위해 임야와 밭 5천여평을 사고 73년 교직을 그만둔 뒤에는 본격적으로 도라지, 천궁 등 약초를 재배했다. 하지만 수입이 좋지 않아 몇년만에 그만두고 염소 방목·양봉을 시작했으나 이마저도 힘에 겨워 지난해 모두 처분했다. 지금은 산수유 100여 그루와 두릅 재배로 용돈을 벌어 쓰고 있다.

"이 산골에 돈이 뭐가 필요 있어. 쌀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데…. 욕심낼 것 없지. 자연을 벗삼아 무심(無心)하게 살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거지."

집 앞 텃밭에는 수박·고추·가지·오이 등 갖가지 무공해 채소와 산나물이 자라고 있다. 자급자족하고 남는 것은 서울·포항·대구·부산 등지에 나가사는 자녀들에게 보낸다.

툇마루에 앉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듣다보니 작렬하던 태양도 어느덧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할머니가 저녁준비를 하는 사이 또다른 주민인 안씨집을 찾아갔다.

안씨집은 강 할아버지 집에서 불과 300여m 남짓한 거리. 가는 길에 폐가(廢家)들이 여기저기 수풀에 묻힌 채 지붕만 드러나 보였다. 안타깝게도 안씨는 집에 없었다.

강 할아버지는 "아마 아래 상옥리로 갔을걸세. 어떻게 보면 이 마을에서 태어난 안씨가 진짜 마지막 도등기사람인 셈이지. 젊었을때는 참 똑똑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안씨는 현재 이 곳에서 혼자 살고 부인과 자녀들은 부산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섭섭했지만 다시 강 할아버지 집에 도착하니 푸짐한 저녁상이 차려져있었다. 참비듬나물무침, 오이무침, 고추, 된장, 고추장, 가지·양파·호박 두루치기는 '웰빙' 그 자체였다. 단숨에 밥 한 공기를 후딱 해치웠다. 어스름 산골 집에서 먹는 저녁 식사는 잊지못할 맛이었다.

양철지붕위로 설익은 감 떨어지는 소리, 바람이 댓잎에 부딪히는 소리, 이따금 들려오는 산짐승 울음소리. 부조화 속 조화처럼 모든 것이 아름다운 선율로 다가왔다.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을 떠나온 기분이 이런 것일까?

"시내로 나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안해보셨어요?" 모든 시름과 짐을 벗어놓은 듯 편안해보이는 강씨 부부에게 그만 우문을 던졌다. "편리함에 젖어 있는 도시인들은 불편하게 느껴지겠지만 구속받지 않고 평화롭게 자연과 벗하며 살아가는 이 편안함을 잘 모를거야."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얼굴을 간지럽히는 따가운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 새벽 5시30분인데도 이 곳의 아침은 새들의 노래소리와 함께 깨어나고 있었다. 도시에서라면 아직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산 속의 아침은 벌써 등을 떠밀었다.

깊은 산 속에 아무런 시간적 흐름도 느끼지 못할 것 같은 도등기 마을. 강 할아버지 부부는 그렇게 도등기 마을을 지키며 세상속 사람들을 향해 웃고 있었다.

◇ 도등기 마을은

도등기마을은 서쪽으로 청송군 부동면 항리, 동쪽으로 영덕군 달산면 옥계리와 각각 경계를 이룬다. 포항, 청송, 영덕 등 3개 시·군의 경계 지점에 놓여 있는 셈.

마을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옛날에 피난하던 사람들이 밤에 길을 잃고 이곳을 지나는데 산 중턱에 불빛이 있어 가보니 불이 아니고 환하게 피어난 복숭아 꽃이라서 '桃燈基'라 했다는 설과 길을 따라 가보니 환한 불빛이 있어 터를 잡았다는 '道燈基' 설 등이다.

마을 생성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이 곳 출신인 하옥리 임상태(75) 전 이장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조상들로부터 신라때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족히 400~500여 년 된 노거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최소한 400년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등기마을로 가려면 포항시 북구 죽장면 하옥리 청소년수련원 앞 '하옥슈퍼'와 청송군 부동면 항리 '진흥사' 입구에서 출발하면 된다. 두 곳 모두 4륜구동 지프로만 갈 수 있고 초행은 다소 위험하다. 걸어서 갈 경우 하옥슈퍼에서는 1시간30분, 진흥사에서는 1시간 정도 산길을 타야 한다.

마을 앞으로는 동대산(東大山)이 멀리 보이며 그 밑으로는 상옥(上玉)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하옥(下玉)계곡을 거쳐 영덕군 달산면 옥계리에서 합쳐 옥계(玉溪)계곡을 이룬다.

포항·임성남기자 snlim@imaeil.com

사진: 강할아버지 내외가 다정스럽게 저녁을 먹고 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