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반성과 사죄의 이중성

입력 2005-08-19 11:54:34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광복 60년을 맞은 올해 더더욱 이 의미가 가슴에 와닿는다. 그런데 일본 언론들이 고이즈미 총리의 8'15 담화에 일제히 "말보다 실천이 중요하다"는 사설을 게재했다. 이를 뒤집어보면 그동안 일본 정부가 과거 식민지 지배와 아시아 침략전쟁에 대해 한 사과의 말은 진정함이 담기지 않은 말이었다는 증거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두 차례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되풀이했다. 하지만 그 말에서 진정한 반성과 사죄를 찾기란 쉽지 않다. 말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은 곧 마음'이다.

올해는 한'일 수교 40년이 되는 해이자 한'일 우정의 해이다. 하지만 올들어 한국과 일본의 양국 관계는 더욱 차가워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고, 일본의 독도 침탈 야욕이나 왜곡된 새 역사교과서 채택 등으로 우리 국민의 일본에 대한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게다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일본인들의 망언'망발이다. 그들은 틈만 나면 한국'중국 등 과거 침략전쟁에 피해를 입은 이웃국가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말을 해오고 있다.

한국인을 혐오하는 내용으로 일본 내 베스트셀러가 된 '만화 혐한류'(マンガ 嫌韓流)의 저자 야마노 샤린(山野車輪)은 "종군위안부 문제는 날조"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고, 얼마전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 신사 측은 "야스쿠니에 합사된 A급 전범들은 범죄인이 아니며, 이들을 재판한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은 부당하다. 재판이 절대 옳았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고 언론에 공식답변을 냈다. 망발의 절정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유족원호법'을 근거로 A급 전범으로 기소된 수형자들이 일본 국내에서는 범죄자로 간주되지 않았다며 '전범=범죄인'의 등식을 부정함으로써 태평양전쟁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국가들의 공분을 샀다.

1946년 5월 공판이 시작된 도쿄재판을 계기로 새로 국제법상의 범죄로 규정된 '평화에 대한 죄' '인도(人道)에 대한 죄'는 적어도 일본에 있어서는 의미 없는 법 조항일 뿐이다. 도쿄재판은 종래의 전시국제법에 규정된 '통례적인 전쟁범죄'에 추가해 침략전쟁의 계획과 준비'개시'수행 등을 범죄로 보는 '평화에 대한 죄', 전쟁전 또는 전쟁 중에 이뤄진 살해'학대 등 비인도적 행위를 범죄로 보는 '인도에 대한 죄'를 범죄로 규정하고 이 범죄에 대한 전쟁지도자로 지목된 개인의 형사책임을 인정했다.

이처럼 명백한 국제법조차 무시하는 일본이 UN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해 가난한 제3세계에 경제원조 카드를 내밀며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를 애써 지우려는 것은 바로 이중성이다. 일본인 납치문제만 해도 일본인들의 이중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누구를 두둔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국민이 북한에 납치된 것에 대해서는 끈질기게 목소리를 높이며 이슈화하면서도 종군위안부나 난징대학살 등 엄청난 반인류적 범죄에 대해서는 그들은 눈을 감아버린다. 이 같은 뉴스를 접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인들의 역사의식은 도대체 어떤 구조일까'라는 의문점을 갖게 된다.

일본의 서양중세사학자인 히토쓰바시대학 아베 긴야(阿部謹也) 명예교수는 저서 '일본인에게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일본인 특유의 생활 형태인 '세켄'(世間) 속에는 역사가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족'일가친척'학교'회사'동아리'동창회 등 '세켄' 속에 철저히 들어가 살고 있는 일본인들은 누구도 세켄에서 벗어나기 힘들며 세켄은 개개 일본인의 행동을 구속한다고 한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로 세켄에서 배제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 세켄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그들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웃나라', '인류', '지구촌'이라는 세켄이다. 일본이 이를 염두에 두었다면 그들이 말하는 '통절한 반성과 사죄'는 이미 진정성을 얻었을 것이다. 서종철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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