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가. 급증하는 자살 문제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10대 남매의 동반 투신 사건은 믿기 어려울 만큼 충격적이다. 한 재혼 가정의 남매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열한 살짜리 남동생은 죽고, 열세 살의 누나는 중태란다. 놀랍게도 남매는 서로의 작은 손들을 나일론 끈으로 묶은 채였다. 혼란스럽다. 도대체 무엇이 아직 머리 말랑말랑한 이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걸까.
가정이 무너지는 소리가 온 사방에서 들려온다.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형제가 형제를 찢는 짓거리가 도를 넘고 있다. 무간지옥이 따로 없다.
새어머니 소유 토지를 욕심 낸 60대 남자가 이를 불평하는 90대 노모와 크게 다툰 뒤 노모의 목구멍에 강제로 화장지를 넣어 숨지게 했다. 거짓말로 부모에게 돈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잔인하게 부모를 살해한 뒤 태연히 장례식까지 치른 인면수심의 30대 남자,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전처와 딸을 살해하려던 장년의 남자, 자녀 양육권 문제로 다투다 전 남편을 흉기로 살해한 여자….
한때 '잘 나가는 형제경영'의 대표적 사례였던 두산가(家)에는 지금 경영권 분쟁으로 형제들간의 이전투구가 점입가경이다. '자녀교육 3계명' 등 성공적인 자식 농사로 부러움을 받던 재벌 가문이 오명으로 얼룩지고 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식욕'성욕이라기보다는 '안정 욕구'라고 한다. 심신이 편안해야만 식욕도 성욕도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족'가정은 안정을 위한 중요한 보루이다. 미국의 저명한 가족치료학자인 머레이 보웬(Murray Bowen)은 "사람은 결혼과 가정생활을 통해 친밀감과 소속감'안정감을 누리고 싶은 욕구, 그리고 자녀 양육을 통해 보람을 느끼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킨다"고 주장했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욕구가 정상적으로 충족되는 가정은 '순기능 가정', 제대로 채워지지 않는 가정은 '역기능 가정'으로 구분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찌그럭, 쨍강 요란스런 소리를 내는 가정은 바로 역기능 가정이다. 이런 유형의 가정을 들여다보면 대개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가족 중에 이른바 '성인 아이들'이 있다. 나이와 모습은 분명 성인이지만 그 속은 미움과 분노, 열등감, 강박 관념 등으로 꽉 차 있어 내적으로 성숙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얼굴엔 불만이 가득하고 하는 짓은 늘 삐딱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쓴 뿌리'때문이다.
사람에겐 누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저마다 '쓴 뿌리'를 갖고 있다. '쓴 뿌리'는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가족의 폭언과 거친 행동, 자존심을 짓밟는 언행 등이 씨앗이 되어 마음속에 심겨 싹을 틔우고 수년, 수십 년간 뿌리를 내린다. 쓴 뿌리가 무서운 것은 그것이 우리 삶 전체를 파괴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치 사원 건물을 무너뜨리며 괴이한 모습으로 자라나는 앙코르와트의 거대한 나무 뿌리처럼.
'쓴 뿌리'는 우리 마음의 종양이다. 그러나 종양에도 악성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듯 '쓴 뿌리' 역시 노력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마음의 상처를 잘 극복하면 오히려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살벌하게 변해 버린 우리 사회의 가족'가정 문제의 해법도 결국 이 같은 쓴 뿌리를 다스리는 데 있다 .
대나무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한 모든 나무에는 나이테가 있다고 한다. 나이테에는 그 나무의 성장통이 담겨 있다. 가뭄과 병충해에 시달린 상처, 번개를 맞았을 때, 불이 났을 때 등 온갖 고통의 응어리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무는 그런 상처를 한 겹 한 겹 이겨내며 자란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 마음 속에 자라는 쓴 뿌리를 그때그때 뽑아내는 자만이 삶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전경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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