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의 파리 살롱전은 유난히 뒷소문이 많았다. 하여 그 해에는 낙선된 그림들을 모아 전시한 적이 있었다. 이때 공개된 마네의 '풀밭위의 식사'는 그 당시 파리 젊은이들을 매료시켰으며 분명히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제시했다.
조이한의 '위험한 그림의 미술사'(2002)는 마네와 함께 카라바조, 프리드리히, 뭉크, 뒤샹 등 시대를 앞선 불우한 다섯 미술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카라바조는 성화를 모독한 화가로, 프리드리히는 당대의 고전주의에 반기를 든 버릇없는 작가로, 뭉크는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화폭들로 작가와 평론가를 모욕했다. 뒤샹은 그나마 혁신을 지향하는 '독립 살롱전'이긴 하지만 가명으로 변기를 출품하는 식의 의도적 스캔들로 미운 털이 박혔다.
그러나 이들의 창작 행위는 나름대로의 존재 이유가 있었고 시대적 맥락이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에 후세에서라도 빛을 얻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없이는 제대로 된 미술사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예술가들은 사회를 전복하려는 발칙한 인간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은 '우상 파괴'의 작업이다. 전통이나 관습에 맞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술가들의 임무이며,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예술이 발전하는 유일한 동력이다.
그래서인가? 사회 일각에서는 공영방송, 그것도 10대들이 주 시청자인 생방송에서 엽기 쇼를 벌인 '언더' 들을 이해하자는 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만약 이들이 벌인 짓이 공연예술의 발전 맥락과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라면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 홍대 해방구에서 소비되는 힙합 문화의 어설픈 전도사 노릇이나 하는 맥락에서 그런 일을 벌였다면 이들을 '예술가'라 불러주어서는 안된다. 진정한 개혁가였던 카라바조, 뭉크, 마네가 지하에서 울 일이다.
박일우(계명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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