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0주년-어제,오늘 그리고 내일-(2)민족대표 33인 묘소

입력 2005-08-11 13:5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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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독립에 목숨을 바친 할아버지의 묘역이 다른 독립유공자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어 후손으로서 죄를 짓는 심정입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박준승(朴準承·1886∼1921·천도교) 선생의 손자 기수(57·농업·전북 정읍시 산외면)씨. 그는 정읍시청 옆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충렬사 한쪽에 자리 잡은 할아버지 묘소를 찾을 때마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울창한 나무 숲에 둘러싸여 그늘진데다 묘소 바로 옆에는 한국전쟁 당시 정읍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다 화재로 숨진 이름 없는 42인의 묘지까지 들어서 있어 누구를 위한 자리인지도 분간하기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정부와 유족이 정읍시 영원면에 수십억 원을 들여 완공한 독립운동가 백정기(白貞基·1896∼1934) 의사의 사당·기념관과 비교해 박 선생의 묘소 옆에는 흉상 하나만 세워졌을 뿐 초라하기 그지 없다.

기수씨는 "정읍시에 주변 나무를 베어줄 것과 자그마한 사당이나 기념관을 지어달라고 수차례 건의했지만 수십 년 동안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며 "그나마 시에서 주기적으로 벌초라도 해줘 다행"이라고 푸념했다.

또 다른 민족대표인 양한묵(梁漢默·1862∼1919·천도교) 선생이 묻혀 있는 전남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묘소는 자그마한 봉분과 비석 등만 휑하니 자리를 지키며 겨우 명맥만 유지, 독립유공자의 것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다.

해당 지자체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아 고령의 손자인 회린(83·화순군 도곡면)옹이 직접 관리하고 있는 실정이다.

회린옹는 "군(郡)에서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아 내가 1년에 두어 차례 직접 벌초를 한다"며 "애초 문중의 결정에 따라 선산에 할아버지를 모셨지만 관리가 힘들어 이제는 국립묘지로 이장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독교 대표로 독립선언문 서명에 참여한 최성모(崔聖模·1874∼1937) 목사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묘소도 육군 모부대 예비군 훈련장 안쪽에 방치돼 있다.

후손인 손자 4명이 지난 70년대 모두 미국으로 이민가는 바람에 묘역 관리는 군부대 장병이 1년에 2, 3차례 벌초를 해주는 것이 전부여서 여름이면 잡초만 무성해 으스스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이 부대 관계자는 "묘역 주변에 철조망을 둘러쳐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명절 때마다 잡초 제거나 벌초를 하고 있다"며 "양주시나 의정부 보훈지청 등 관련 행정기관에서도 찾아오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나마 최 선생의 묘소는 유족들이 국내 친지를 통해 뒤늦게 정부에 이장을 요청해 10월 중 대전 현충원으로 옮길 예정이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의 기폭제가 된 독립선언문의 주역인 민족대표 33인의 묘소 가운데 일부가 푸대접을 받고 있어 관리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해당 지자체는 예산 등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묘소 관리부터 사당이나 기념관 건립에 '나 몰라라' 하고 있으며 보훈처 등 정부기관도 '건국훈장을 받은 애국지사의 경우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이 가능하다', '민족대표들만 특별히 관리할 수는 없다'며 손을 놓고 있다.

민족대표 33인 유족회 이현기(74) 회장은 "민족대표들의 증손자들이 40, 50대에 접어들어 이들에게 묘소 관리의 부담을 떠넘기기도 어렵다"며 "국립묘지 이장이 어렵다면 국가나 지자체가 소외받고 있는 민족대표 묘역을 유적지나 사적지로 지정하는 등 관리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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