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0주년-어제,오늘 그리고 내일-(1)애국지사들 쓸쓸한 노년

입력 2005-08-10 14:43:53

이번 8·15가 되면 일제강점에서 광복된 지 60년을 맞지만 아직도 지방 각지에 광복과 일제청산을 실감하기 어려운 어두운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다. 수원보훈원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가족 등의 회한을 담아 광복 60년의 과거·현재·미래상을 연결해 짚어본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평생 숨 죽이고 살아오다 이제는 여덟 평짜리 '감옥'(임대아파트)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으니…."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수원보훈원 내 보훈복지타운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1세대' 애국지사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살아온 얘기를 쉽게 털어놓지 않았다.

지난 1996년 8평짜리 임대아파트 4개동과 13평짜리 3개동 등 모두 7개동으로 지어진 복지타운에는 독립유공자와 상이군경, 전몰유족 등 국가유공자·유족 45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이 가운데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는 모두 9명. 이들은 기본연금 70만8천 원과 등급별 부가연금을 받아 월 5만~10만 원의 아파트 관리비를 내고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 물론 이런 혜택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전국 300여 명의 애국지사들에 비하면 그나마 처지가 나은 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항일투쟁의 주인공이었다는 자부심과 긍지는 여전했지만 대부분 80대 고령이어서 말할 기력조차 없을 정도의 노환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해방후 왜곡돼온 역사를 되새기고 싶지 않아했다.

독립운동가가 홀대받아온 역사 속에 대부분 힘겨운 삶을 이어오다가 전국에서 유일하게 국가유공자 복지시설로 건립된 이곳으로 옮겨와 노년을 보내는 이들에게 광복절은 한스런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아픔'일 뿐이었다.

국내에서 비밀항일투쟁을 했던 강백(82)옹은 "친일파 청산도 제대로 못했는데 무슨 60주년이냐. 차라리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내는 것이 맘 편하다"며 끝내 말문을 열지 않았다.

광복군 제3지대에서 군자금 전달 임무를 수행했다는 이영수(80)옹도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60년간 얘기해도 국민들이 관심이 없는데 또다시 말해 무엇하겠느냐. 이제는 기억도 희미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며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다른 독립유공자들도 지나간 삶의 궤적을 떠올리며 긴 한숨과 함께 힘겹게 얘기를 이어갔다. 중국에서 광복군 활동을 했던 황갑수(84)옹은 8평짜리 조그만 원룸형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의식주를 해결하며 쓸쓸한 노년을 지내고 있었다.

다리를 뻗고 눕기에도 좁은 방 한쪽에는 삶의 족적이 묻어 있는 서류들이 반듯이 보관돼 있고, 안중근 의사가 뤼순(旅順) 감옥에서 쓴 '國家安危 勞心焦思(국가안위 노심초사)'라는 글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감옥처럼 좁은 곳에 생활하도록 해주고 국가보조금 조금 올려준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냐. 처우개선도 중요하지만 항일투쟁 역사를 알리는 노력이 더 절실한데 일반 국민들조차 관심이 없으니…." 황옹은 1942년 일본 주오(中央)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44년 1월 조선학도지원병으로 강제징용됐으나 그해 5월 중국 후난(湖南)성으로 탈출한 뒤 광복군에서 활동했다.

주로 중국 내륙에서 중국 국민당과 합동으로 항일 게릴라전을 벌였다는 황옹은 해방 이후에도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줄곧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며 암담했던 당시 상황에 대해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해방 뒤 충남 조치원에서 교사생활을 했는데 교장·교감이 모두 친일파였어. 독립운동가는 그저 숨 죽이고 살았지. 광복군 출신이었다고 말하면 교사들뿐 아니라 일반 주민들까지 (우리를) 무시하고 배척했거든…."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광복회 경기지부장으로 일하며 '역사 알리기'에 힘쓰고 있는 황옹은 "지난 60년간 너무도 우스운 나라가 돼 버렸다"며 연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과 함께 보훈복지타운 내 13평짜리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오희옥(79)씨는 만주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별동대장이었던 오광선(1896~1967) 장군의 둘째딸.

일제강점기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어린시절을 보낸 오씨는 14세이던 1940년 중칭(重慶)에서 광복군이 창설되자 언니 오희영(1923~1970)씨와 함께 광복군에 들어가 후방 선전활동에 참여했다.

구한말 의병장이었던 조부(오인수·1867~1935)와 부친에 이어 3대에 걸쳐 항일투쟁을 해온 것이다. 하지만 집안의 항일운동 전력 때문에 해방 이후 그의 생활도 그리 순탄치 않았다. 부친은 해방후 광복군 국내지대 사령관을 지냈으나 친일세력의 견제로 8년간 장군 진급에서 배제돼 대령 계급에 머물렀고, 고통과 가난은 가족에게 대물림됐다.

"뭘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친일파 자손은 떵떵거리며 살면서 땅까지 되찾겠다고 큰소리치는데 애국지사들은 정부보조금으로 10평 남짓한 임대아파트에 사는 것만도 고맙게 여겨야 하는 게 현실이야." 보훈복지타운에 거주하는 애국지사들은 '보름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매달 15일 만나고 있으나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한 이들이 갈수록 늘면서 참가자 수가 매년 줄고 있는 것이 걱정이다.

지난 96년 이들과 함께 복지타운에 입주했던 애국지사 15명 가운데 6명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 현재 생존해 있는 이들도 수원보훈원에서 준비한 차량을 이용해 매주 2, 3차례 서울보훈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는 것이 주요 일과일 정도로 노환이 심하다.

광복회 경기지부 안홍순 사무국장은 "앞으로 10년만 지나도 독립운동 1세대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서 "항일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평생 힘겹게 살아왔는데 이제는 무관심 속에 여생을 보내고 있으니 더이상 누가 국가를 위해 희생하려 하겠느냐"며 고개를 저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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