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과거사 청산

입력 2005-08-06 13:30:42

안병직 외 지음/푸른역사 펴냄

독일은 처음부터 과거청산의 모범국은 아니었다. 1946년 뉘른베르크 나치 전범 재판은 승자의 재판이라는 비판도 있었고, 죄형법정주의 법리와 관련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또 나치 범죄의 책임을 히틀러를 비롯한 극소수 나치 엘리트 집단에 국한, 독재 정권을 용인한 대다수 독일 국민들에게는 결과적으로 면죄부를 주었다는 지적도 있다.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숙청은 국민 분열과 반목 그리고 갈등은 해소하지 못했다. 재판 없이 진행된 약식 처형에서 처벌의 폭력성과 임의성이 계속 문제시되었다. 특히 독일군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여성 부역자에게 공개적인 고문을 가한 행위는 더 그랬다.

사법적 청산 과정에서도 처벌의 형평성과 일관성에 문제점이 드러났다. 처벌론과 관용론이 맞서는 가운데 분열과 반목 그리고 갈등과 혼란을 초래했고, 그것이 성찰과 치유의 노력으로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더군다나 알제리 독립전쟁 기간 중 프랑스가 저지른 학살과 고문 등 비인도적인 범죄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망각과 침묵, 은폐로 일관했다.

남아공은 진상 규명과 국민적 화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넬슨 만델라로 상징되는 민주화세력 집권 이후 과거청산을 두고 치열한 논란과 갈등과 협상을 통해 진상규명은 철저히 하되 진실을 털어놓는 가해자에게는 사면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군부정권이 자행한 납치와 살해에 대해 '실종자 진상조사 국가위원회'를 구성해 진상규명에 나섰지만, 정치적 봉합으로 진정한 화해와 국민통합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칠레도 피노체트 정권의 무자비한 인권 탄압에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를 설치해 일련의 과거 청산 조치를 취했지만, 사회적 동의를 얻는데 실패하고 현재 진행형의 과제로 남겨놓았다.

스페인의 과거청산 방식은 의외로 간단했다. 사면법을 제정해 과거의 모든 불법, 폭력 행위를 사면시킨 것이다. 과거사를 들춰 분열과 반목을 다시 조장하기보다는 상호간에 관용과 화해가 중요하다고 판단해 불행한 과거를 잊기로 한 것이다. 러시아는 탈(脫)스탈린 작업의 폭풍에 휩쓸려 고르바초프와 소련 체제 자체가 붕괴해 버렸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군사정권 시절을 겪으면서 한국의 현대사는 어둡고 복잡한 과거를 묻어둔 채 많은 사람들을 악몽에 시달리게 하고 있다. '세계의 과거사 청산'은 과거청산과 관련해 그동안 국내에 잘못 알려지거나 혹은 간과된 외국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과거청산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제시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과거 청산의 모범 사례란 없다"고 말한다. 수많은 갈등과 진통을 겪은 독일과 프랑스를 무조건 과거청산의 모범국으로 추켜세울 수 없다. 스페인처럼 '망각협정'이라고 불리는 타협을 통해 과거를 묻어버린 경우도 있다.

결국 이 책은 과거청산과 관련해 다양한 외국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단순히 찬성과 반대, 청산과 관용의 시각이 아니라 청산의 대상, 기준, 방식 등이 얼마나 그 명분에 부합하고 합리적인지 따져보고 숙고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2년여 동안 '역사와 기억-과거청산과 문화정체성 문제의 국가별 사례연구'라는 학술연구 프로젝트의 결과를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듬어 발간한 책으로 학술적 성과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이 담겨 있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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