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비긴즈

입력 2005-07-14 15:53:35

박쥐와 동일시…공포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홍길동이 있다면, 고담시에는 배트맨이 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과 영웅이라는 이면에는 정신적 트라우마(trauma:정신적 외상)가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의 주인공 브루스는 부유한 집안의 외동 아들이었다. 고담시의 최고 기업가이자 의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사회봉사를 실천하는 박애주의자였다. 브루스는 일곱 살쯤 뒤뜰에서 놀다가 깊은 우물 속으로 추락한 적이 있었다. 어둡고 습한 우물 안에서 갑자기 날아오르는 박쥐 떼에게 브루스는 크게 놀란다.

그 후 자주 악몽을 꾸고,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어느 날 브루스는 부모님과 오페라 관람 도중 박쥐가 날아오르는 장면이 나오자, 겁에 질려 실신할 지경이었다. 아들을 데리고 황급히 극장을 빠져나온 아버지는 강도를 만나 브루스의 눈앞에서 살해당하고 만다. 브루스는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죄책감에 휩싸인다. 분노와 복수심으로 자라난 브루스는 현실을 등지고 히말라야로 떠난다. 무술을 연마하며 와신상담의 시간을 보내던 브루스는 마침내 부정부패와 범죄로 죽어가고 있는 고담시를 구하기 위해 돌아온다. 그가 바로 영웅 '배트맨'이다

브루스는 왜 하필 박쥐(bat)로 변장했을까. 브루스는 박쥐 공포증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도 박쥐 공포 때문이었다. 브루스는 그렇게 두려워하던 박쥐와 자기를 동일시함으로써, 박쥐 공포에서 해방되려는 무의식적 의도가 있었다. 배트맨이 되어 세상의 악을 응징함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고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처럼 무섭게 자기를 공격했던 대상을 닮게 행동함으로써 불안을 이겨내는 것을 '공격자와의 동일시'라고 한다. 예를 들어 귀신놀이를 하던 어린 아이가 "나는 귀신이다" 라고 하며, 귀신 흉내를 내는 것은 귀신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귀신 공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행동이다. 호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나중에 더 호된 시어머니 노릇을 하는 것도 이런 기전이다.

아이들은 주위의 중요한 사람의 좋은 행동을 따라 하면서, 옳고 그름을 알게 되고 사람답게 사는 양심이 형성된다. 자식이 부모의 성격을 닮는 것도 동일시를 통해 일어난다. 브루스가 어린 시절 청진기를 갖고 노는 것도 의사인 아버지를 동일시한 행동이다.

'동일시(identification)'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닮지 말아야 할 사람을 닮는 것은 부정적인 동일시라고 한다. 부모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하면, 어린 아이에게는 그것도 강점으로 보이므로 따라한다. 깡패, 범죄자, 잔인무도한 자를 닮는 경우이다.

병적인 동일시도 있다. 힘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이사람 저사람 옮겨 가면서 모방하고 붙어 있으면서 안정을 얻으려 하기 때문에, 이런 동일시는 일시적이고 과장적이고 상대방의 힘이 사라졌다 싶으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강한 사람을 흉내 내면 자신도 강하게 되었다고 믿는 것, 독재자에게 아부하는 해바라기 정치꾼들, 남의 작품을 모방하는 예술인들, 신흥종교의 광신도들이 그 예이다. 특히 경계성 성격장애자들은 병적 동일시를 많이 사용한다. 브루스는 내면에 숨겨진 정신적 상처가 악을 물리치는 동기가 되었던 것 같다.

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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