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안중근 'Until he is home'

입력 2005-07-07 11:41:29

인명사전을 들춰보면 일당(一堂) 이완용과 안중근 의사(義士)의 족적은 설명이 참 길다. 둘 다 양반 가문, 공직자의 후손이지만 한쪽은 독립투사, 한쪽은 친일매국노다. 이완용의 장황한 이력서의 맨 끝에 꼭 따라붙는 것이 있다. '당대의 명필(名筆)'이라는 것이다. 한때 그의 친필병풍을 본 적이 있다. 불(佛)이란 글자의 끝획이 2m가량 아래로 뻗쳤는데 그야말로 자로 잰듯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실로 대단한 필력(筆力)이었다.

이완용의 문재(文才)를 칭찬하자는 뜻이 아니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사람의 글값이 천양지차로 벌어짐을 보아서이다. 일당의 글값은 예나 지금이나 갖고 있어봤자 한폭에 몇십만원이요 그나마 갖고 있는 것 자체를 별로 자랑스러워하질 않는다. 안(安) 의사의 유묵을 갖고 있다면 (값으로 따져 죄송하지만) 적어도 몇천만 원을 호가할 것이다.

안 의사가 남긴 붓글은 200여 점으로 그 중 20점이 보물 제569호로 지정돼 있다. 거개가 1910년 경술(庚戌)년 만주 여순(旅順)감옥에서 쓴 것으로, 대표작이 동국대에 있는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이란 글씨다.

의사의 붓글 중에서 조국 독립의 의지를 직접 표현한 유일한 유묵 '獨立(독립)'이 돌아가신지 95년 만에 환국, 곧 그 실물이 선보인다고 한다. 66×32㎝의 그 누렇게 바랜 한지(韓紙),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의 맹세로 잘랐던 그 단지(斷指)의 왼손바닥 장인(掌印)이 선명한 먹물을 보는 순간 우리는 '대한국인 안중근'의 쿵쾅거리는 심장의 박동소리를 들을 것만 같다.

이 유묵은 일본 히로시마 간센지라는 절의 주지 시다라 마사노부(設樂正純)씨의 가문에서 보관해온 것으로, 여순 감옥 간수였던 작은 할아버지가 안 의사 순국 직전에 받은 것이며, 이제 한'일 우호의 표시로 고국에 돌려보내게 된 것임은 보도된 바다.

엊그제 고건 전 국무총리를 비롯한 열린 우리당 의원 11명이 중국 하얼빈시의 제1회 한국주간 행사에 참석차 출국했다고 한다. '하얼빈'이 어디인가. 바로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열차에서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 세 발로 쏘아 죽인 그 곳 아닌가. 하얼빈 시장을 만나 그 곳에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공원이나 동상 건립을 추진해 보겠다니 만시지탄이다. '과거사 규명'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네거티브한 것만이 과거사가 아니다. 여기에 한나라당 사람이 없는 것이 섭섭하다.

그러나 동상의 건립보다 더 중요한 우리의 의무가 있다. 바로 안 의사의 유해 발굴 작업이다. 당시 교도소장 딸의 증언뿐이긴 하나 안 의사의 유해는 형무소 부설 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죽음을 앞두고 안 의사는 동생에게 이렇게 유언했다. "내 죽은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 이제 정부가 광복 60년 만에 반장을 위한 공식적인 외교작업을 시작했으니 이 또한 만시지탄이다.

현실 속의 '광복 60년'은 여전히 분통과 안타까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본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대(代) 이은 몰락의 현실과 친일파 후손들의 잇단 토지 반환 소송을 보면서 그러하다. 전쟁포로-실종자 수색 합동사령부(JPAC)가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Until they are home)' 분쟁지역을 찾아 누비는 미국과, 최근 6'25 국군포로 247명의 실명을 처음으로 확인할 때까지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우리를 보면서 또한 그러하다.

지난해 한 언론기관이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삶을 표본조사한 바 절반이 스스로를 '하층민'이라고 대답했다. 300여 명의 조사 대상자 중 절반이 고등학교 문턱조차 못 밟았을 뿐더러 그 후손 중 일부는 "더 이상 이 사회에 기대할 것 없다"는 반감마저 드러냈음을 본다. '독립운동=패가망신'의 모순 속에서, 다시 6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독립운동 하겠다는 사람 몇이나 될까. 안중근 의사, '그가 돌아올 때까지(Until he is home)' 이 현실은 바뀔 수 있을까. 광복 60년의 소회다.

姜健泰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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