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두꺼비가 된 아빠…딸도 까르르
주말 저녁, 30대 부부의 대화.
아내 : 맨날 보는 TV, 지겹지도 않냐? 아빠가 TV 앞에 멍하니 누워있으니까 애들도 덩달아 보잖아.
남편 : 당신이 좀 놀아주면 되잖아? TV 보는 건 노는 게 아니라 재충전이야.
아내 : 아빠하고 놀고 싶어하잖아. 아까도 그래. 책 좀 읽어주면 얼마나 좋아.
남편 : 한글 다 읽을 줄 아는데 왜 읽어줘. 자꾸 그러면 애들 습관만 나빠져.
아내 : 아빠가 책 읽어주면 애들 습관 버린다고 도대체 누가 그래? 그리고 책도 별로 없잖아.
남편 : 왜 책이 없어? 애들 방 책장에 꽂힌 책들은 다 뭐냐? 다 읽기나 한거야?
아내 : 차라리 말을 말자. 돈만 벌어다주면 아빠 역할 다 끝난거야?
출근하던 아내가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7살 딸과 즐거운 반나절을 보낼 것. 단, 혼자 컴퓨터 하도록 내버려둘 경우는? 알아서 할 것.'
이런, 집안 청소가 훨씬 낫겠다. 현관에서 아내를 배웅하고 돌아서자 딸 아이가 팔짱을 낀 채 묘한 웃음을 짓는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7살짜리의 미소가 아니다. 아빠가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자는 식이다.
"우리 다영이, 비디오 볼래?" 한숨 더 잘 속셈으로 던진 선심성 제안에 딸은 "아빠, 비디오나 컴퓨터나 뭐가 달라? 같이 놀아야지. 엄마한테 얘기할까?" "......"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첫 임무는 동화책 읽어주기. 어린이용 동화책에 이렇게 글자가 많은지 미처 몰랐다. "아빠, 그렇게 읽으면 재미 없잖아. 진짜 두꺼비가 말하는 것처럼 읽어야지." 아빠는 국어책 읽기를 하는데 딸은 동화구연을 원했다. 어줍잖게 성우 흉내까지 내가며 한 권을 다 읽고 다른 책을 집어들자 딸의 항의. "그냥 끝내면 어떡해? 이야기를 나눠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나라 독서교육이 너무 잘 돼 있다. 갑작스레 열린 부녀간 독서토론회. 하지만 대화를 나누며 사뭇 놀랐다. 그저 집안을 어지럽히며 돌아다니는 '말썽쟁이 작은 인간'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나름대로 논리정연한 질문과 틀린 답에 대한 조리있는 반박이 쏟아졌다.
딸 자랑이 아니다. 다른 아빠들도 자녀와 책을 읽고 대화를 해보라. 우리 아이는 책 읽기 싫어한다고? 아빠가 맨날 뉴스며 프로야구만 보는데 자녀가 책을 읽을 턱이 있는가. 장장 1시간에 걸친 독서토론을 마치자 딸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침을 먹고 설겆이하는 동안 하고픈 일을 생각해 두라고 했다. 행주를 빨고 돌아서자 낑낑거리며 거실로 뭔가를 들고 나왔다. 제 덩치만한 블럭통. 아, 블럭놀이를 하자는 거구나. 4살 때 블럭을 사준 뒤 한동안 함께 놀았는데, 그 뒤로 블럭놀이하자며 조를 때마다 "혼자 만들어. 잘 하잖아"라고 핑계를 댔다. 아빠와 깔깔거리며 놀던 때가 좋았던 모양이다.
블럭을 거실 가운데 쏟아놓고 집이며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빠와 기싸움을 벌이던 '작은 악동' 이미지는 사라지고 그저 즐거운 표정. 그런데 불청객이 등장했다. 3살 아들이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딸 아이 얼굴엔 경계의 눈빛이 가득하다. 아니다 다를까. 기껏 만들어놓은 작품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제 딴에는 동참하려고 했던 것. 그러나 상황은 이미 최악. "성진이 없어졌으면 좋겠어"라며 딸은 울상을 짓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성질 죽여가며 놀아준 앞선 시간들이 헛일이 될만한 위기 상황이다.
별 일도 아닌데 왜 저러나?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아들 녀석 아침을 챙겨주며 딸 아이 기분 풀리기를 기다렸다. 아무리 어려도 제 풀에 화가 가라앉을 시간은 필요하다. 20분쯤 지났을까, 유인책을 폈다. "아빠랑 컴퓨터 게임할래?" 그제서야 딸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방문을 열었다. 칭얼대는 아들 녀석을 무릎에 올려놓고 나란히 컴퓨터 앞에 앉았다.
좋아하는 사이트는 '쥬니버'(http://jr.naver.com). 캐릭터를 이쁘게 꾸미거나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는 '플래쉬게임'이 가득하다. 유치하다는 생각도 잠시, 정작 게임을 시작하자 '요거, 장난이 아니네' 싶었다. "아빠! 그렇게 하면 안돼. 그거 말고 이걸 눌러야지. 어휴, 답답해." 언제 토라졌는가 싶게 게임에 몰입했다. 혼자 하는 것보다 훨씬 재밌다며 까르르 넘어간다. 3살 박이는 뭔지도 모른 채 마우스를 잡아보려고 용을 쓴다. 자칫 컴퓨터에 딸을 뺏길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마음이 열렸다. 소파에 드러누워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혼자서 놀라'고 인상쓰던 아빠. 기분 좋을 때 기껏 20, 30분 놀아주고는 피곤하다며 엄살 피우던 아빠. 아이들은 일에, 술자리에, TV에 빼앗긴 아빠를 되찾고 싶어했다. 넓지않은 아파트를 뛰어다니며 술래잡기 하는 것도 재미있고, 거실을 치워놓고 킥보드를 타는 것도 즐거웠다. 말도 안되는 스토리로 아빠가 연출하는 인형놀이를 아이들은 넋을 잃고 바라봤다. 물론 철없는 아들 녀석의 방해가 심했지만. 반나절이 지나 아내가 돌아왔을 때 몸은 녹초가 됐지만 마음만은 상쾌했다. "재미있었어?"라는 엄마의 질문에 딸은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최고야!"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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