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옥입니다-장마

입력 2005-06-29 10:56:48

장마철이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장마전선'으로, 일본에서는 꽤 낭만적인 이름인 '매우전선(梅雨戰線)'으로 부른다. 앞으로 3, 4주. 허리며 관절에 탈이 난 사람들은 벌써부터 온몸이 찌뿌듯해진다. 감성파들은 날씨 따라 기분이 오르내린다. '산은 홀로 있어도 슬퍼하지 않는데/ 나는 비만 와도 주막에 있다' 는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괜스레 마음이 울울해져서 막걸릿집에라도 가 앉아 있고 싶어진다.

곱슬머리들에게도 장마철은 신경 쓰이는 때다. 아무리 애써 손질해 봐야 잠시뿐, 습기에 닿자마자 제멋대로 꾸불거리니 만날 머리 안 빗은 사람처럼 부스스한 꼴이 돼버린다.

농부들은 장마가 그저 얌전히 지나가 주기를 바랄 뿐이다. 애써 심은 볏모들이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기를, 요란스런 폭풍우에 과실들이 패잔병처럼 힘없이 나뒹굴지 않기를….

우산 장사 아들과 나막신 장사 아들을 둔 어미 마음처럼 이맘때엔 누구나 기분이 오락가락하기 쉽다. 어차피 내리는 비. 비가 오면 우산이 잘 팔려 좋고, 해가 나면 나막신이 잘 팔려 좋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현명할 터.

예전엔 비 오는 날의 별미가 있었다. 애호박전이나 부추전, 분이 보얗게 나도록 쪄낸 햇감자 같은 것들이었다. 빗소리에 섞여 들려오던 누이의 따글따글 콩 볶는 소리는 또 얼마나 정겹던가.

소나기 쏟아지는 날, 양철지붕 위를 두드려대는 빗소리는 손가락 장단을 치고 싶을 만큼 음악적이다. 지붕 홈통을 타고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도 흥겨움을 더해준다. 특히나 대숲 가득 쏟아지는 빗소리는 그대로 시(詩)다. 빗소리를 들으며 빠져드는 낮잠은 달콤하기 짝이 없다.

슬로(Slow)족은 아닐지라도 때때로 '느린 삶'의 여유를 누릴 필요가 있다. 길고 지루할 수도 있지만 장마철은 단거(端居: 편안하게 지내거나 한가롭게 지내는 것)의 즐거움을 알게 하는 데 제격이다.

올해도 벌써 절반이 지나간다. 아니, 아직 절반이나 남아 있다. 한 해의 중턱에서 찾아온 장마는 그러기에 우리 삶의 여백이며, 쉼표다. 잠시라도 느긋이 쉬었다 가라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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