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는 지각 변동을 가져올 만큼의 정치적 대란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만이 유일하게 제도화되고, 또 이를 통해 아주 합리적인 방식으로 상징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현대사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몸바꾸기가 일어난 것이다. 2000년대 문화는 이성이 빠져나간 자리에 몸으로 때우는 신체가 지배의 초점이 되었다. 소설가 은희경의 '아내의 상자'는 그런 몸바꾸기 시대를 예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아내의 상자'는 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의미하는 바는 일상적이지 않다. 상호소통이 제거된 일상 속에서 계속 겉돌기만 하는 대화를 통해 그녀는 단지 섹스 대상으로서의 몸에 대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
아내가 말하면 '대꾸 대신 접시에 남은 마지막 사과살에 포크를 찍어' 누르는 남편, 결국은 아내가 혼자 말하게 되는 언어의 단절 속에서 의미는 사라지고, 목소리만 의미 없는 기호로 살아남아 부표처럼 떠돈다.
그래서 아내는 단절된 세상에서 경험한 것들을 지우기라도 하듯이 하나하나 상자에 가둔다. 은희경은 여성의 문제를 여성 화자를 통해 말하게 하는 대신, '나'라는 남성에게 말하게 함으로써 서사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케 한다.
남자가 여성문제를 말하게 함으로써 여성의 문제가 여성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부메랑이 되어 남성에게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절묘한 서사 전략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각자 자신의 말만 한다'는 남성 중심의 일상을 뒤집어 놓는다.
타인이 '나'를 바라보게 만드는 역지사지의 서사 전략은 대립보다는 '우리'라는 인간 공동체의 조화로운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 그녀의 소설 속에서 여성 주인공들은 싸워서 인생을 바꾸려는 대신에 '잠을 잔다'.
상처 입힌 세상을 향해 빗장을 지르고, 체념론자가 되어 가는 주인공들의 페시미즘은 '여성들이여, 테러리스트가 되라'고 외치는 공허함보다는 한수 위의 전투법이다. 은희경의 '그녀들'은 진정한 승리자가 인내로 사막 건너는 법을 체득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상래 영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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