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광장-배운 자와 가진 자들의 도덕성

입력 2005-06-22 08:33:48

1997년 무렵으로 기억된다.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잠시 다녀왔던 유학생 부부가 입국이 거부된 사건이 미국 LA 한인교포신문에 보도되었다.

이 사건 이후 동일한 성격의 사건이 몇 년간 계속해 발생하였고, 마침내 한 교포신문에서는 이 사건을 특집기사로 다루게 되었다.

사건의 내용인즉, 그 유학생 부부가 미국의 저소득생활자를 대상으로 하는 메디컬(Medical)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아 아이를 출산했는데, 이 사실이 입국 서류심사 과정에서 적발돼 입국이 거부되었다가 그 프로그램으로부터 받았던 혜택만큼의 금액을 지불하고서야 입국이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되었던 사항은 이들 부부가 자격이 되지 않는데, 이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으려고 약간의 편법을 동원해 자격조건을 맞추었다는 부분이었다.

메디컬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정부가 저소득생활자들에 대해서 출산과 육아에 들어가는 비용을 지원해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의 경제적 혜택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보험을 들지 않았을 경우 출산비용이 5천 달러 이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혜택이 대략 어느 정도였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문제의 유학생 부부처럼 상당수의 사람이 이와 같은 경제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편법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눈을 찔끔 감았던 부분이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이 사건은 바로 이러한 이들의 행동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으며, 이후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메디컬 프로그램의 신청이 현격히 줄어들었다는 신문 보도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8년 전의 이 사건을 다시금 떠오르게 하는 사건 하나가 최근 방송·언론매체를 통해 보도되었다.

이중국적자의 경우 병역의무를 마치기 전에는 국적을 포기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국적법 개정안이 5월 4일 국회에서 통과된 이후, 전개되었던 국적포기의 물결에 관한 기사가 그것이다.

이 문제를 다루었던 보도프로그램이나 신문기사들이 주목했던 점은 국적을 포기한 이들의 99.7%가 20세 이하였다는 사실과 이들의 부모나 조부모라는 사람들이 전 장관을 비롯한 고위 공무원, 대학교수, 경제계 인사 등 우리 사회의 배운 자와 가진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 혜택이라는 것이 병역기피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그들의 아들이나 손자가 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을 피하고자 국적포기라는 선택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 사건을 다루었던 방송·언론매체의 태도다.

사회 지도층과 관련된 문제가 터질 때마다 늘 그래왔듯이, 방송·언론매체의 초점은 우리 사회의 배운 자와 가진 자들의 도덕성 문제였다.

이중국적자인 자식을 위해 이번에 행한 국적포기라는 합법적인 선택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혜택을 누리기 위한 개인적 차원의 선택이었으며, 이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를 가지고서 방송·언론매체가 여론재판을 하려 한다는 인터뷰 내용에서 강조된 점은 우리 사회지도층의 도덕성 결여라는 문제였다.

메디컬 프로그램의 신청으로 잃을 수 있는 것보다 얻을 수 있는 것이 더 많으며, 또한 국적포기로 인해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면, 메디컬 프로그램을 신청하고 국적포기를 하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어찌 보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국적을 포기시켰다는 사회적 비난에 대해 잠시 눈을 찔끔 감으면, 내 아들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생활하면서 병역회피라는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에게 있어서 잠깐 동안의 사회적인 차원의 도덕적 비난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자의 문제가 입국거부처럼 메디컬 프로그램의 신청으로 잃을 수 있는, 다시 말해 받을 수 있는 혜택만큼의 혹은 이보다 더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서야 해결되었듯이, 후자의 문제도 한국국적의 포기로 인해 얻을 수 있는 혜택보다 잃을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진다면 어렵지 않게 해결이 될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라는 바는 이제는 더 이상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이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해 나갈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가 부도덕한 선택을 하지 않도록 제도와 법을 정비해가는 방식으로 해결해 나갔으면 하는 것이다.

안용흔 대구가톨릭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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