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신발을 벗고

입력 2005-06-18 08:37:33

하루에 한 번씩은 산길을 맨발로 걷는다. 일상에 찌들리거나 피곤이 몰려올 때면 산 속으로 들어가곤 한다. 천년 고도인 이 작은 도시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탓에 맨발로 걷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맨발로 걸으면 심장으로 혈액을 돌려보내게 되어 발이 가벼워지고 피로가 사라진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맨발로 걷고 나면 남은 하루의 일상이 즐겁다.

나의 맨발로 걷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맨발로 세상을 만나보고 싶은 호기심이 그중 제일 크다. 산길을 맨발로 걷다 보면 자잘한 돌들이나 땅의 살갗에 노출된 나무뿌리에 발가락이 걸리기도 한다. 한번씩 그 앞으로 가로질러가는, 작은 길을 닮은 뱀들에 여린 발가락은 움찔거린다. 그러나 맨발은 우선 새장 같은 집에 갇혀 있는 외로운 발가락을 땅과 대기의 미물들과 직접 접촉하는 즐거움에 바르르 떨게 한다. 늘상 만나는 직장의 동료들과 일들 사이에도 나는 신발 속 구부린 발가락처럼 외로웠을 것이다. 뜨거운 물에 몸을 푸는 작설의 혓바닥처럼 발가락은 서늘한 대지의 품 속 적당히 데워진 햇살과 바람, 그늘에 녹으며 그 순한 몸을 푼다. 우련히 풀리는 발가락의 연한 떨림이 전신을 타고 흐른다. 숨을 쉬는 발가락은 땅의 미세한 돌기, 미물의 움직임 하나도 민감하게 온몸을 실어 나른다. 꼬물대는 벌레들, 수런거리는 풀잎들, 자잘한 뿌리들, 돌과 흙, 유리 조각들과도 제법 아는 체를 한다.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생각이 되어 산 식구들의 표정들을 받아먹기에 바쁜 이쁜 발가락들. 오래 이렇게 걷다보면 발가락은 아스피린 한 알처럼 다 녹아버릴 것 같다. 그러면 대지에 발을 딛고 있는 나무의 뿌리 같은 발은 돋아날까. 내 팔다리에는 푸른 잎맥이 돋아날까. 사람들은 반인반수의 인간을 신기하게 쳐다볼까? 생각의 이랑 속에서도 일상과 도시의 피로에서 묻은 독을 방생하며 강바닥의 연어처럼 발가락은 어느새 산이 만드는 햇살과 그늘의 바람 안에서 헤엄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부풀리는 광고와 성과 훔쳐보기라는 도시가 준 시선이 이곳에 이르면 깊어지고 순해진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연신 까닥하는 둥굴레잎들, 새끼들을 위해 분주한 멧새라도 나를라치면 재빨리 떡갈나무 잎사귀 뒤로 숨거나 거미줄 같은 연한 줄을 뿜어 공중에 매달리기도 하는 자벌레들의 생존의 서늘함과 숙연함. 얼마 전엔 내 쪽으로 기웃거리는, 봄산의 마음처럼 날씬한 새끼 멧돼지를 보았다. 멧돼지는 뚱뚱하고, 찢어지는 소리를 가졌고 난폭하다는 선입견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바위 아래 진설된 과일에 솔깃했던 이 개구쟁이는 다가가자 씨익 고개를 흔들더니 길도 없는 골짜기로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한번씩 바위에 걸터앉아, 한때는 몸이었던 죽은 지렁이를 무슨 군단처럼 달라붙어 끌고가는 개미가 만드는 책을 읽는 기쁨도 소홀치 않다.

이곳에서는 사람들도 경계를 풀고 만날 수 있다. 대부분 산책을 나온 이들이거나 산이 가슴에 품고 있는 돌 하나라도 어루만져보기 위해 이 길을 택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눈이 산머루를 닮은 이 사람들도 들끓게 하는 화제가 있다. 방폐장 유치 문제다. 나는 이 문제만 나오면 찬반으로 핏대를 올리는 이 곳 사람들을 보았다. 유치되기만 하면 이 도시에도 3천억원이 지원되고, 중저준위라 환경에도 문제가 없다고 한다. 탑이 기러기보다 많았다는 이 고도도 개발의 논리에 밀려 앞선 도시를 흉내내고야 말게 된 것인가. 방폐장과 고도는 어깨를 맞댈 수 있을까. 가는 곳마다 맨발로 만나게 되는 천년의 긍지는 다가올 천년을 품어안을 수 있을까. 무엇이 이곳 사람들을 왜소해지게 하고 핏대를 올리게 하는가.

기왓 조각과 돌들과 흙들에서 2천년 전의 따순 피들을 마중나가며 내 발들은 요즈음 이와 대비해 자꾸만 초라해지려 하는 이 작은 고도를 명상하고 있다.

손진은 시인·경주대 교수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