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파리에 입성이다. 파리 공항은 입국 심사가 깐깐하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새벽이라 직원들이 귀찮은지 도장만 찍어주고 다행히 무사통과다. 왠지 너무 수월하다 싶었는데 문제는 의외의 부분에서 생겼다. 나가는 길을 못 찾겠는거다. 공항의 끝과 끝을 수차례 왔다갔다 땀을 빼고서야 겨우 셔틀버스 정거장을 찾았다.
북역에서 내리니 반바지에 반팔을 입은 여름 복장을 한 사내는 나밖에 없다. 5월 초의 파리는 우리나라와 달리 매우 쌀쌀하다. 사람들 모두 긴팔에 긴 바지, 심지어 겨울 복장으로 무장했는데 내 패션은 여름이다. 현지인들이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속으로 '정신나간 사람 아냐'라고 비웃는 듯하다.
내 생애 3번째로 파리를 밟는다. 그래서인지 별로 낯설지가 않다. 협찬 여행사에서 정해준 몽마르트 언덕 밑의 숙소를 찾아갔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2년 전 처음 유럽에 발을 디뎠을 때 파리에서 하루 묵었던 바로 그 곳이었던 것이다. 참 인연이란 묘한 것 같다.
포도주의 산지 에페르네로 가기 위해 동역으로 향했다. 에페르네는 샹파뉴의 대표적인 도시라고 알려져 있다. 샹파뉴는 프랑스어로 발포성 포도주를 뜻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샴페인이다.
1시간 넘게 기차 창가를 막연히 바라보다보니 벌써 에페르네에 이르렀다. 역 규모를 보니 우리나라 영천역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샴페인 저장소가 에페르네에 많다고 하는데 역을 보니 왠지 의아심이 든다. 점심 시간에는 저장소 투어가 없다. 도착한 시간은 딱 낮12시 30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인포메이션을 향해 갔으나 여기도 점심 시간이라 문이 닫혀 있다. 게다가 비가 한두방울 떨어지니 무척 난감하다. 인포메이션 앞에 있는 지도를 보고 예약도 없이 투어가 가능한 저장소를 알아보기 위해 무작정 길을 나섰다.
걷다가 화장실을 가자는 아랫배의 신호가 오는 순간 그토록 찾던 저장소 2군데를 발견했다. 너무나도 다행스럽게 한군데는 점심시간 없이 투어를 한다. 화장실을 갈 수 있다는 기쁨에 환호를 외치며 들어갔다. 카운터 직원이 손가락으로 이상한 문을 가리킨다. 이상한 문을 열자마자 향기가 내코를 확 찌른다. 바로 샴페인 향이다. 포도주를 마실 때는 눈으로 보고 코로 향을 맡고 혀로 음미하라고 했지 않은가. 진한 향이 내 몸을 젖시고 온 건물에 펴지는 듯하다. 향에 취해 계단을 내려가니 가이드 투어 중이다. 꽤 여러 명이 있기에 가보니 불어로 투어를 한다. 그래도 혼자서는 못 다니니 눈 딱 감고 일행에 묻혔다.
처음에는 현대식 공정을 보여주고 음침한 곳으로 이끌고 가더니 놀라운 장소를 소개한다. 족히 100여년이 넘어 보이는 지하 동굴. 100여년의 흔적은 서로 뒤엉켜 있는 이끼와 곰팡이, 먼지에 오롯이 스며있다.
샴페인을 저장하고 있는 병의 입구가 신기하게도 위쪽으로 향해 있지 않다. 모두가 눕혀져 있거나 비스듬히 혹은 뒤집혀져 있다. 왜 이렇게 되어있냐고 묻고 싶지만, 회화 실력이 모자란다. 궁금증을 뒤로 하고 가다보니 더 놀라운 게 눈 앞에 펼쳐진다. 190여년의 숙성 기간을 자랑하는 수십 병의 샴페인들. 그 중에 1818년산 샴페인이 눈에 띈다.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시대에 따라 보관 틀도 다르다. 투어는 막바지에 이르러 다시 자동화 공정을 보여준다. 기계는 멈춰 있고 가이드는 불어로 쉼없이 이야기하지만 알아들을 리 없다.
투어의 마지막 단계. 바로 내가 고대하던 시음 시간이다. 유럽에서 먹어보는 첫 번째 술이라 가슴이 벌렁거린다. 샴페인도 포도주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눈으로 보고 코로 맡고 혀로 맛을 느껴본다. 처음에는 탄산음료처럼 싸한 맛이 밀려온다. 우리나라에서 생일 때나 맛보던 샴페인과는 비교 자체를 거부한다. 입 속에 아리는 감미로운 맛에 나도 모르게 '캬'하고 탄성을 내지른다.
한병 사가고 싶다. 하지만 부피도 부피려니와 가격이 나의 하루 생활비보다 비싸다. 눈물을 머금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포기할 수밖에. 에페르네를 떠나 파리로 돌아오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에페르네! 기다려라! 내가 샴페인 사러 다시 온다"라고 되뇌면서.
숙소로 돌아와 짐을 갖고 방에 가보니 2년 전 내가 머물렀던 바로 그 방이다. 참 인연도 깊지. 그 수많은 방 중에 같은 방에 머물다니. 내가 머무는 방에 미국 버지니아에서 온 '글락'이란 친구가 있다. 술을 한잔했는지 벌겋게 달아올라 나에게 왁자지껄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런데 대충 알아듣겠다. '이렇게 기쁠 수가'. 감동의 눈물이 막 흐르려고 한다.
저녁을 먹고 나니 12시간동안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쌓인 피로가 몰려온다. 그래도 파리 여행은 해야지. 몽마르트 언덕으로 그냥 발길을 옮겼다. 언덕 중턱에 있는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사람을 구경하는 여유를 부렸다. 우리나라에서 만약 이렇게 하면 행인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볼텐데 이곳은 사람들이 신경 안 쓰고 지나간다. '음메, 좋은 것' 해가 사붓이 저물어간다. 갈수록 공기가 차가워진다. 첫날의 어리둥절함을 가슴에 묻고 숙소로 돌아와 그대로 뻗었다.
김상규(대구대 특수교육학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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