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현 지음/ 여시아문 펴냄
가끔 세상살이의 고단함으로 어디든 무작정 발길을 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폐사지(廢寺址)를 찾아 떠나볼 일이다. 한때 위용을 자랑하던 큰 절이 인생살이와 같은 윤회를 거치면서 그 흔적만 겨우 남아있는 그곳은 말 없는 침묵으로 위안을 주고 있다. 어떤 곳은 밭으로, 어떤 곳은 낚시터로 쓸쓸히 잊혀가는 모습을 보면서 불심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폐사지는 대략 3천200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세상에 알려진 것은 100여 곳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잊혀가고 있다.
'잊혀진 가람탐험'은 시인 장지현씨가 4년 동안 발품을 팔아 폐사지를 답사한 답사기다.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지부터 제주도의 법화사지까지 전국 폐사지 35곳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라 할 수 있다. 폐사지에 대한 애정이 기본이 된 이 답사기는 계절의 변화와 역사의 흔적이 묻어난다. 일일이 묻고 발품을 판 저자의 노고가 느껴져 폐사지에 대한 애잔한 단상을 한층 북돋운다.
일부 폐사지는 복원되는 과정에서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인 '직지'가 탄생한 흥덕사지는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인쇄문화의 상징적 의미로 복원됐다. 하지만 이 흥덕사지는 사지(寺址)가 아니라 사지(死址)가 돼버렸다. 석탑과 금당은 형식적이고 구색 갖추는 수준에서 복원됐고 무늬만 금당의 형태일 뿐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이렇듯 종교의 성지를 문화재의 가치로만 보는 것은 그 안에 깃든 정신과 의미를 간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중요한 불교적 가치가 있지만 무관심 속에 무참히 붕괴된 절터도 있다. 밀법이 성행했던 전북 무안의 총지사지는 최근까지 주초석이 남아있었지만 도굴범들이 포클레인까지 동원해서 모조리 가져가버렸다. 저자는 이를 두고 폐사지 관리에 무심한 불교계를 질타하고 있다.
수만 평 감나무 과수원으로 변해버린 전남 담양 서봉사지는 남아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를 겉만 보는 이들의 시력의 한계일 뿐 눈여겨보면 감나무 그늘마다 무성하게 깨어진 자기 조각 등 절터의 흔적들이 뒹군다. 석축이며 부재들이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제대로 발굴조사를 한다면 서봉사지는 폐사지 지도를 바꿔놓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저자가 대표적 폐사지로 꼽는 곳은 어디일까. 저자는 주저없이 원주 일대의 3대 폐사지를 꼽는다. 원주 정산리 거돈사지에 들어서면 수령 1천 년이 넘는 느티나무와 3층 석탑, 화강석 불대좌 등이 조화를 이뤄 거돈사지 특유의 애잔한 모습을 연출한다. 또 사력(寺歷)을 증언해주는 각종 석물들이 절터 왼쪽에 즐비하게 누워 있어 폐사지이긴 하지만 꽉 채워진 느낌을 전해준다는 것이다.
폐사지는 불교의 뒷모습이다. 저자는 세상살이가 시끄러울 때 슬쩍 역사의 뒤꼍으로 돌아가 옛 절터를 더듬으며 고만고만한 세상살이에 위안을 얻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또한 잊혀가는 가람탐험은 잃어버린 한국 불교의 과거를 찾아 오늘을 살아가는 씨줄과 날줄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는 일이다.
저자의 문학적 소양이 행간에 숨어 있어, 읽는 이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준다. 또 찾아가는 길을 지도와 함께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어, 마음이 동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
최세정기자 beac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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