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년전 선조들과 함께 살아요-발굴 현장 '인부' 김용만씨

입력 2005-06-04 10:11:54

"천마총, 안압지, 황룡사지 등 신라 유물터는 물론이고 익산 미륵사지 등 백제 문화권까지 쫓아다니며 발굴 터에서 반평생을 보냈어. 이래봬도 천마총 금관(국보 188호), 안압지 목선 같은 것들을 다 내 손으로 꺼냈지. 아마 내 손때가 제일 먼저 묻었을 걸. 허허허."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 입구 발굴현장에서 만난 발굴인부 김용만(74·경주시 동천동)씨. 김씨는 별 다른 직함도 없는 일용직 현장 인부지만 국내 유물 발굴전문가들은 그의 이름만 대면 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 김 반장!'하며 그의 실체를 인정한다.

김씨는 지난 1973년 천마총 발굴을 비롯해 안압지, 감은사, 황룡사, 공주 무령왕릉, 미륵사(전북 익산) 등 신라와 백제를 넘나들며 굵직한 발굴현장에는 대부분 참여, 국내 발굴역사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밥벌이라도 할 요량으로 처음 이 일에 손댔지. 그런데 할수록 재미가 붙더라고. 1천∼2천 년 전 선조들과 함께 산다는 기분이 들어. 안 해본 사람들은 이 재미 백 번 말해도 모를 걸." 천마총 발굴개시 이전 보문단지 일대 등 소규모 발굴현장에 가끔씩 나갔던 것을 포함하면 발굴경력 40년에 육박하는 김씨지만 지금도 미발굴 유적지만 보이면 가슴이 뛴다고 했다.

"저 밑에 선조들의 얼이 담긴 유물이 들었다고 생각해 봐, 그게 흥분 안 할 일인가."

김씨는 문화재연구소나 박물관 등지의 전문가들에게서 "현장경력 10년차 정도의 박사급 연구원이나 학예사들보다 훨씬 나은 실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는 "무슨 소리, 나야 시키는 대로 땅이나 파고 유물 나르는 일이나 하지, 내가 뭘 안다고"라며 스스로를 낮췄다.

'그래도 30년 넘게 일했는데 이제는 감 잡힐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묻자 "고분이나 무덤, 절터 등은 이제 거죽(표면)만 봐도 어떤 유물이 나올지, 유물터가 어떻게 생겼을지 속으로는 대충 감이 잡힌다"며 "그러나 건물터는 경력 30년이 지나도 감 안 잡히기는 매한가지"라며 손끝 경험으로 익힌 장인(匠人)의 경험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의 기억에 가장 강하게 남은 현장은 천마총. "천마총은 대릉원 일대 고분 가운데에서 가장 작고 초라했어. 그래서 그걸 먼저 팠는데 유물들이 쏟아진 거지. 하지만 겉모양은 어마어마하게 컸는데도 막상 들춰보니 도굴꾼들이 먼저 훑고 지나가 텅 비어 있는 유적을 보면 우리 같은 인부들도 힘이 쑥 빠져 버려."

김씨는 경주를 비롯한 전국에 흩어진 미발굴 유적들을 열거하면서 "중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지만 방치돼 있는 유적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면서 "도굴꾼들의 손이 더 타기 전에 하루 빨리 발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 나이 올해로 일흔 넷이야. 발굴 인건비 받아 4남매 남부럽잖게 키웠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지. 다만 내 생전에 천마총 같은 유적지 한 번만 더 봤으면 좋겠어"라며 신라 왕경 유적지 발굴에 참여하고 싶다는 개인적 바람을 밝혔다.

그는 또 분황사 발굴 현장에 참여한 동료 인부들을 가리키며 "저기 봐, 다들 70대 노인들이야. 젊은이들이 이런 일을 해 봐야 역사에 자부심을 갖게 되는데…"라며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데 대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경주·박정출기자 jcpar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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