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영령 앞에 머리 숙입니다

입력 2005-06-04 10:55:26

6·25 전쟁 55년, 2005년 6월 한국

6·25 전쟁이 발발한 지 55년째. 올해도 6월은 왔다.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국적을 포기하는 젊은이들이 줄을 이었지만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호국영령들 앞에 한 송이 꽃을 바치려는 어린 새싹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고 있다. 그 뒤로 남편과 아들·딸들을 잃었던 유족들의 쓸쓸한 추념도 계속된다.

누군가 이 속에 묻혀있다는 사실만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이들. '전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이젠 할머니가 되어버린 새댁.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져야 한다.

3일 오전 11시쯤 대구시 남구 대명동 앞산 충혼탑 공원. 빨강·노랑·파랑 유니폼을 차려입은 유치원생들이 줄지어 참배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국화꽃 한 송이씩을 든 고사리 손은 충혼탑 앞에 서자 긴장된 눈치로 선생님 얼굴만 빤히 쳐다본다.

"자, 꽃은 모두 단상에 놓고, 배꼽에 손! 머리를 숙이고 묵념합니다."

아이들은 말이 없다. 부모님께 혼날 때처럼 뭔가 잘못했다는 샐쭉한 표정을 짓고 옆 친구와 하던 장난도 모두 멈춘다. '전쟁'을 모르지만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을 가르치고 싶다는 선생님만 목소리를 높인다. "전쟁이 뭐야", "하면 안된대… " 수군거리던 아이들이 충혼탑 속에 있는 위패를 보기 위해 줄지어 들어갔다. 아이들은 명패 속 이름 하나하나를 크게 외친다.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 자리에 와 있는 아이들 곁에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할머니. 바로 '상병 변태학' 위패 앞에서 국화꽃을 들고 있던 김명순(76) 할머니였다. "생전에 정말 좋아했던 사람이 여기 묻혀 있지요. 그래서 예뻐보일려고 오랜만에 분을 발랐어요."

한 살배기 아들만 남겨둔 채 1950년 겨울 참전한 남편. 사랑했던 사람의 전사통지서를 참전 1개월 만에 받아야만 했던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아들 때문에 재혼도 하지 않았다. 남은 삶은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했다.

대한무훈수공자회 이장우(76) 중부지회장은 아이들에게 "여기 있는 이 이름들은 모두 대한민국을 지켜준 용사들입니다. 할아버지 용사들. 우리 나라를 튼튼하게 지켜주셨던 든든한 국군입니다. 여러분도 씩씩하게 자라서 또 지켜줘야 합니다. 알겠죠?"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생뚱맞은 표정이다. 이 지회장의 조끼에 달린 훈장만 신기한 듯 쳐다본다. "전쟁이 뭐예요?"라고 묻는 아이에게 이 할아버지는 "친구들과 싸우는 거 나쁜 일이죠? 전쟁도 비슷해요. 많은 사람이 싸우는 나쁜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중·고등학생들은 몇 명을 죽였느냐고 꼭 물어보지요. 그것만큼 잔인한 질문도 없어요. 유치원생들에게는 이런 참배가 평생 동안 기억될 겁니다. 우리 유공자가 사회에 할 수 있는 봉사란 그때의 쓰라린 현장을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것뿐이죠."

"뉴스에 보니까 국적포기자가 많다더만요. 대학생 중 전쟁이 나면 참전하겠다는 대답이 절반도 안 된대요. 투철한 국가관도 없고…. 어렵게 나라를 살렸는데 이제는 떠난다고 야단법석이고. 씁쓸합니다." 꼬마 참배객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엔 회한이 묻어난다.

3일 오전에만 1천여 명의 학생들이 다녀간 충혼탑에는 지역 출신 육·해·공군 장병과 경찰 등 5천88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증손자뻘의 아이들이 이렇게나 많이 와서 재롱을 떨고 가는데. 우리 남편 오늘 하루만은 정말 뿌듯하시겠네요." 김 할머니는 가슴으로 울고 있었다.

서상현기자 ssang@imaeil.com

사진 = 대구 남구 봉덕동 채송화어린이집(원장 허정미) 원생 40여 명이 위패가 모셔진 충혼탑 안에서 대한무공수훈자회 이장우 중부지회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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