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관의 인물탐방-KDI 김동률 연구위원

입력 2005-06-03 11:11:15

삶을 바라보는 눈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당연히 꿈도 제각각 다르다. 살아온 저만의 경험이 있기에 어느 길로 가든 인생은 드라마틱하다. 멋있게 여기는 삶의 행로도 제각각이다. 그래서 사람 끼리의 만남과 대화는 새롭고 색다른 삶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KDI 연구위원 김동률(金東律.46)씨는 올해가 가기 전 턱걸이 20회를 하겠다는 엉뚱한 꿈을 말한다. "학자로서 사회활동의 포부는 비밀"이라며 대신 밝힌 목표다. 30번 이상을 거뜬하게 하던 어린시절로 돌아갈 수야 없지만 맹연습에 7개를 하는 지금 추세라면 턱걸이 20회는 불가능한 꿈이 아니란다. "몸이야 어쩔수 없지만 마흔 나이에 어김없이 따라오는 중년의 정신을 청춘의 마음으로 돌리겠다"는 당찬 포부다.

10년 기자생활을 미련없이 버리고 36살 늦깍이로 유학을 결정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무모하다"였다. 다니던 신문사의 편집국장은 아예 사표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 나이에 유학해서 박사를 딴들 어디에 쓰겠느냐는 말이 이어졌다. 짐부터 보냈다. 미국간지 한달만에 외환위기가 덮쳤다. 우리 돈의 가치가 한없이 떨어져 햄버거로 끼니를 떼울 때면 콜라를 살까말까를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돈보다 공부가 어려웠다.

6년여만에 학위를 받고 귀국한 그는 연세대 언론연구소 전문위원으로 강단에 섰다. 매체경영학이란 전공도 도움이 됐다. 신문기자를 해 봤기에 강단에서는 우리 언론풍토를 매섭게 몰아치기도 했다. 사회정의를 주장하면서도 자사 이익을 앞세우는 이율배반적인 가면을 벗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엄숙주의에 바진 언론 현실도 마뜩찮다. 대학원 강의를 듣는 수강생 중에는 언론인이 많다. 그래서 나이많은 이에게는 '선배님'으로 호칭한다. 그러면서도 학점은 짜다. 강의가 시작되면 아예 문을 닫아 걸만치 지각 결석을 미워한다.

미국갈 때 다섯살과 세살이던 딸과 아들은 다행히 우리말을 잊지 않아 학교 적응을 잘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자'는 인생의 목표대로 아이들 학교에서 학부모 회의가 열리면 그가 직접 간다. 밥을 퍼주는 당번이 걸려도 그가 간다. 딸애는 창피하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할 일이라고 믿기에 당당하다. 희한하게 바라보던 주위 사람들도 이젠 자연스럽게 본다. 그러나 우리 교육 풍토는 아쉬운 점이 적잖다. 학부모회의도 저녁 8시쯤으로 늦추자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부 선생님들이 땡하면 집에 가는 습관에 익숙한 때문이었다.

고전음악은 전문가 수준이다. 파바로티 내한 공연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달성 가창이 고향으로 사대부고를 나왔다. 희망이 멀어지는 고향 대구가 안타깝다. KDI에 들어가자 신문 한 부를 구독할 권리가 생겼다. 단 하나의 신문으로 고향의 매일신문을 선택했다. 어린시절 동대구역전에 걸려있던 '긍지높은 시민'이란 현수막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당당하던 고향 대구가 자꾸만 늙어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서영관 논설위원 seo123@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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