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 지음/돌베개 펴냄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의적은 역사적으로는 이미 유물이다. 그러나 의적 이야기는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박물관에 갇힌 시체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현실에 대한 저항적 희망을 표현하는 하나의 은유이다. 이 책은 체계적인 연구서가 아니다. 착한 도둑놈에 대한 이야기가 어떨까하여 이런저런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홍규 영남대 법과대학 학장이 기존 질서의 부조리에 도전한 의적들의 삶과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와 문화, 그들을 소재로 한 노래, 민담, 소설, 영화 등을 재미있게 소개한 인문교양서를 출간했다. 의적의 대명사 로빈 후드와 홍길동에서부터 러시아 농민 반란을 이끈 스텐카 라진,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 의적 마흐노, 선상에서 민주적 조직 원리를 실험한 해적들, 시칠리아 독립운동에 참여한 미피아 살바토레 줄리아노, 멕시코 혁명에서 전설적인 북부군을 이끈 산적 판초 비야, 인도 하층민 여성 피해자의 화끈한 복수자 폴란 데비, 목동 출신으로 수많은 헝가리 민요와 민담 속 주인공이 된 로자 샨도르, 미국 서부 개척기 서민들의 적이었던 은행과 철도회사를 털어 스타가 된 제시 제임스와 빌리 더 키드까지 다른 시대, 다른 지역에서 활동한 의적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의적들은 비천한 출신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부당한 억압과 차별, 그리고 그에 당당히 맞선 용기와 투지, 신출귀몰하며 부패한 권력을 조롱하고 법과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민중들의 소망과 분노를 대신 표현해 주었던 민중의 친구이자 복수자였다. 의적들이 남긴 극적인 삶의 이력은 일상으로부터 일탈과 자유에의 갈망이라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자극하고 있다. 이들은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무력으로 남의 돈을 빼앗는 불한당이 아니라 남의 것을 제 것인 양 빼앗아갔던 부패한 지배권력층을 처단한 심판자였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의적들이 남긴 삶의 흔적을 더듬어 가다 보면 자연스레 이들이 살았던 시대의 아픔, 그 시절 민중들의 고통과 설움이 뒤섞인 역사와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공식적인 역사 기록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가려진 세계 역사의 흐름이기도 하다. 가령 스텐카 라진의 삶은 지주들의 가혹한 착취와 일을 해도 늘어만 가는 빚 때문에 끊임없이 도망을 다녀야 했던 19세기 러시아 농민의 삶과 도망 농민들이 코사크인들과 함께 돈강 유역에 만들었던 자치 공동체들의 역사와 떨어뜨려 이야기할 수 없다. 스텐카 라진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곧 코사크 반란의 역사, 러시아 농민 반란의 역사, 나아가 러시아 인민주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줄리아노의 의적 활동은 수천 년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았고 이탈리아에 통합된 후에도 공업화된 북부 이탈리아의 국내 식민지 취급을 받아야 했던 시칠리아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멕시코 혁명을 이끈 의적 판초 비야의 이야기는 스페인의 아즈텍 침공부터 시작해 멕시코 독립을 거쳐 1910년 디아스의 30년 철권 통치에 맞서 일어난 멕시코 혁명의 중요 순간을 하나하나 짚어 나가며 펼쳐진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의적들은 모두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매력적인 인물들이다. 제시 제임스 일당이 열차 강도에 성공했을 때 미국 최초의 열차 강도사건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민중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역사를 비교적 쉽게 추적할 수 있는 현대 의적들의 경우는 당대 역사 속에서 극단적인 평가를 받았다.
저자는 탁월한 균형 감각으로 이들의 실제 모습과 다양한 문화적 장르들 속에서 치장된 모습들을 가려내면서도 이미지로서의 의적을 소홀히 다루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이미지로서의 의적과 실제 역사 속 의적들은 모두 역사에 대한 민중의 불만과 더 나은 사회를 바라는 민중의 소망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둘 다 충분히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이경달기자 sara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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