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하는 재주 없어도 섬기는 일 자신"
"맡아주십시오." "저는 안되겠습니다.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 "그러지 말고 (사장 보임을)생각해주십시오" "생각해보겠습니다만... 역시 안되겠습니다. "
매일같이 인사담당자가 그룹 회장의 뜻을 담아 서울에서 찾아오고, 전화를 냈다. 안된다고 버티며,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고많은 인재 가운데, 왜 저입니까?" "우리는 성실하고 겸손하게 봉사할 분을 필요로 합니다. "
◆ 급한 세상과 거꾸로 가는 '신 삼고초려'
젊음과 능력과 속도감이 최고의 시대적 가치로 여겨지는 요즘 세상살이와는 판이한 모습으로, 대학(경북대 경영학과)을 정년퇴임한 '노신사'가 대구도시가스 사장에 선임됐다. 그야말로 이변이다. 정충영(66)대구도시가스 사장은 그렇게 업계에 등장했다. 아직 정사장보다는 정교수가 더 잘 어울리는 정충영 사장은 최근 몽골에서 태양력과 풍력을 결합시킨 복합에너지 생산에 성공, 에너지그룹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대성그룹 김영훈 회장의 현대판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지난 4월 부임했다.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가 난무하는 비정한 세월이 아니던가. 젊은 피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을 거듭했다. 그러나 대구도시가스측은 '老 사장'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참 희한하네. 왜그랬을까? 이유는 단하나. 낮은 자세로 시민에게 봉사할 CEO가 필요했던 것이다.
◆ 2만명 독자께 보내는 남산편지의 주인공
대학교수였다고 선임된 것은 아니다. 한해에 대학문을 나서는 교수가 한둘인가. 정사장이 제자와 이웃들을 보듬으며 최선을 다하며 살아온 지난 65년4개월의 삶이 그를 새로운 전문경영인의 길로 인도했는지도 모른다. 투명한 경영과 명확한 목표, 그리고 기업시민의 정신(휴머니즘)이 기업이 살아남는 3요소라면 어쩌면 정사장은 대구도시가스의 정체성을 새롭게 할 최적임자인지도 모른다.
사실 정사장은 교수 시절, 일주일에 두 번씩 온라인상으로 '남산 편지'를 썼다. 짤막하고 경쾌한 싯구로 이뤄진 고도원의 아침편지와는 달리 남산편지에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눈물이 묻어나는 이야기. 누구나 한두번은 겪었음직한 좌절과 불행 그리고 그 극복 후에 찾아오는 아름다움이 담긴 편지. 남산편지를 받아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힘과 용기를 얻고, 착하게 살아야 끝이 좋다는 순수함을 다잡는다.
◆ 대학생 제자를 위한 '생각하는 글'이 효시
6년전 남산편지는 정충영의 대학생 제자들을 위해 쓰여졌다. "강의를 하면서 거리감을 느끼는 학생들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서 그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생각하는 글'이었어요. 일주일에 두세번씩 '생각하는 글'을 받아본 학생들로부터 반응이 왔어요. 자기네끼리 더 돌려보기도 하고, 다른 좋은 소재가 있으면 찾아주기도 했어요."
리플이 달리고, 주변에서 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생각하는 글'과 비슷하게 시작한 신앙글 '남산편지'(그는 남산교회 시무장로이다)와 묶어 통합 '남산편지'를 띄우기 시작했다. 믿음이 있거나 없거나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소재를 구했다.
◆ 좋은 이야기가 많아야 아름다운 세상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야기로 나타납니다. 바로 우리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주인공들이죠. 페스탈로치가 좋은 이야기를 발굴하여 교육에 활용하려고 열중했던 것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의 삶을 알려주면 세상은 더 좋아지겠죠."
정사장은 정직하게 산사람을 소개하는 글을 주로 쓴다. 잘난척 떠드는 사람은 언급되지 않는다. 숨어서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을 알린다. 말없이 희생하며 사는 수많은 남산편지의 주인공들이 있기에 세상은 썩어 문드러지지 않고 유지 발전돼나간다. 그래서 정사장 자신도 글 쓰다가 울고, 교정보다가 울기를 반복한다.
이제 남산편지는 '크리스천 투데이', '영남기독신문'을 포함한 각종 개신교 계통의 각종 언론에서 재인용할 뿐만 아니라 대구교육포럼 등 각종 사이트에서도 단골로 인용되고 있다. 이미 책으로도 서너권 묶여져나왔다.
◆ 남산 편지 때문에 더 망설여
"100여개의 소재를 비축해두고 글을 씁니다."
오전 8시 출근, 저녁 6시 퇴근. 오후 7시쯤 저녁을 먹고 나면 정사장은 컴퓨터 앞에 앉는다. 3시간쯤 남산편지도 쓰고, 전 직원을 대상으로 이메일도 보낸다. 부임한지 두달이 채 못되지만 벌써 7번쯤 이메일을 보냈다. 아직 익숙치 않은지 직원들로부터 답장은 별로 오지 않는다. 하지만, 남산편지에 답장을 써듯이 직원들과 메일을 주고받으며 탑다운 방식의 개혁을 할날도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난해 3천600억 매출에 순이익은 22억에 불과했습니다. 따뜻한 날씨 탓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적자인 셈이지요. 날씨와 상관없이 총력 영업전을 펴고, 그 이익을 독차지 하는 것이 아니라 대구시민과 나누려고 합니다. 기업은 이익을 나누는 것입니다. " 대구도시가스는 지난해 대구 전지역에 묻어둔 배관의 이용자를 늘려가는데 올해 영업 중점을 두었다.
◆ 군림하는 리더가 아닌 섬기는 리더 될터
사실 영업 총력전에서는 직원들이 힘들더라도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는 덕장(德將)이 필요하다. 패권적인 카리스마로 편을 가르기보다는 인의를 중시하고 직원들이 한데 뭉칠 수 있는 부드러운 리더십이 더 힘을 발휘한다. "군림하는데는 재주가 없어도 모시고 섬기는데는 자신이 있습니다." 어려운 이들을 돕는데 더 선수인 아내와 함께 하기를 즐기는 정사장이 부드러운 리더십이 남산의 기적을 일궈낼지 주목받고 있다.
최미화 편집위원 magohalmi@imaeil.com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jhchu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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